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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운 역사, 자유시 참변 & 러시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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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영웅들의 갈등과 분열이 난무한 자유시의 비극.. - 끝나지 않는 역사 왜곡,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레닌의 혁명 : 전제군주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

민족자결권(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겟다)

박은식 曰:러시아 혁명을 통해 종래 극단적인 침략국가가 이제 극단적인 공화국가가 되었다. 여러 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했으며 세계 개조의 첫 신호탄이다.

1919년 도쿄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서 언급된 러시아혁명

 2.8 독립선언서 : 과거 동양 평화를 위협하던 러시아가 이미 군국주의적인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와 박애를 기초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

 3.1 기미독립선언서 : 5천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한 데 모아서 독립국임을 널리 밝히는 것이다. 영원하고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달을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며, 인류의 양심이 드러남에따라 일어난 세계 개조의 좋은 기회와 운세에 순응하여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것(한국독립)을 제기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에 레닌의 혁명이 일어나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성립이 됩니다. 레닌의 이 공화국은 러시아 인민 권리 선언, 평화에 관한 선언, 러시아 및 동양의 모든 근로자에 대한 선언, 이런 선언들을 발표합니다. 즉, 이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만약 이것이 러시아 국경 바깥으로 확산된다면, 아시아의 식민지 국가들, 당연히 조선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여기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이 되었던 거죠. 실제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 러시아 혁명을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기대와 환영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로 식민지를 확대하기 위해서 열을 올렸고 서로 싸웠고 이랬는데, 이런 세계가 달라진다, 이 개조의 조짐을 러시아 혁명에서 봤던 거예요. 또 유명한 1919년 도쿄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서에 러시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대목이에요.
"과거 동양 평화를 위해서, 러시아가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와 바를 기초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을 러시아의 변화로 이야기하면서, 마찬가지로 세계 개조로 연장해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죠. 아마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의 이 혁명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긍정적인 조건을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식민지가 된 것을 막아 달라는 요청을 정말 여러 나라에 했습니다.

미국에 대해서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의 거중 조정 조항을 들어서, 우리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고 있으니, 그럴 때 개입해서 조정을 해 주겠다고 하는 한 조항이 1882년 조선과 미국의 수호 조약에 있었거든요. 이걸 들어서 미국에 개입을 해 달라, 일본을 말려 달라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미국이 이것을 외면했습니다.

1907년에는 헤이그까지 고종이 밀사를 파견해서 일본의 외교권 박탈이 부당하다라고 하는 호소를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도 조선의 이런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다음에 최초로 그 가능성을 봤던 겁니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독립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었을 겁니다. 국내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면, 러시아 땅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대체로 바이칼호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그 지역에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이 넘어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식민지가 되는 이런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대거 이주를 하게 됩니다. 1919년에 아마 20만 명 정도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1922년 러시아 공산당 동국의 통계를 보면, 그 지역에 한국인이 25만 명이 살고 있다고 되어 있고, 25만 명 중에 대부분이 연해주에 살고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러시아는 일본과 싸우는 나라였습니다. 러일 전쟁 이후로 러시아와 일본은 늘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러시아 영토로 넘어가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이런 지역이었기 때문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노령으로, 즉 러시아 땅으로 많이 가게 됐던 겁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다음에 상황이 달라집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일으킨 나라인 독일, 오스트리아, 트리키 이런 나라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여기에 맞서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런 나라들이 참전을 하게 되는데, 일본이 1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한편에 있었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과 러시아가 한편이 됐던 것이죠.

이런 상황이 되니까 러시아 영토 안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재정적으로, 러시아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실제로 억압을 합니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겁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1917년 2월에 한 번의 혁명, 10월에 한 번의 혁명, 그래서 2월 혁명, 10월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황제정 재정이 붕괴되고,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그런데 임시정부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 볼세비키 대립을 해요.

러시아에서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와 볼세비키가 대립하는 이 여파가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극동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런 상황에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정치 활동을 시작합니다. 혁명이 뭔가 희망을 준 거예요. 한국인들의 정치 활동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는데, 이때 한국인들의 정치 활동의 목표는 자치 기관을 창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자치 기관을 만든다라고 하는 게 목표였고, 그래서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라고 하는 단체를 결성합니다. 전이라고 하는 건 전 러시아 땅에 있는 한족회, 한족,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모임을 만들고 총회를 구성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는 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지지했는데, 그렇게 했더니 러시아 땅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실망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케렌스키의 이 임시정부는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거든요. 일본과 싸우지 않는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대다수 국민들은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면 일본과 싸우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니냐,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해요.

그때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의 주장은 이런 겁니다. 일단 우리 독립보다는 러시아 내에서 소수민족으로서 한민족의 자치와 권리 신장을 먼저 해야 된다고 하는 논리였습니다.
 2월 혁명으로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구성이 됐는데, 8개월 만에 10월에 다시 한번 혁명이 일어나서 케렌스키가 축출되고 임시정부가 무너집니다. 대신 볼세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12월쯤 되면 볼세비키가 극동 지방까지 세력을 미치면서 극동 소비에트 정부라고 하는 것을 만듭니다. 그런데 상황이 굉장히 유동적이어서 볼세비키 세력이 극까지 왔지만, 여기에서 재정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던 세력, 이것을 파라고 하는데요. 백위파의 반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변수가 되는데, 러시아의 혁명을 저지하려는 제국주의 (영국,프랑스,미국, 캐나다,일본)열강의 간섭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군대가 러시아의 혁명에 개입을 해서 혁명을 좌절시키려 한 건데, 이때 일본군블라디보스톡에 진주를 합니다. 자, 이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과 외국 군대가 서로 대립을 하게 되는 것인데요. 극동 소비에트 정부가 이 제국주의 국가들과 싸우기 위해서 한국인들을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1918년 2월 하바롭스크에 모여서 고려 혁명자( 이동휘, 양기탁, 이동령, 그리고 홍범도 )회의라고 한 것을 개최합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극동 소비에트 정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우리의 정치 단체를 만들자라고. 하는 생각을 한 거겠죠. 이동휘가 앞장서서 주장한 내용이 이런 겁니다

볼세비키 주의를 받아들여서 고려 혁명을 촉진시키다, 이 동휘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러면서 정당이 만들어지는데, 그 정당이 한인 사회당이라는 정당입니다.

한인 사회당은 그보다 먼저 결성되었던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로 대부분 구성이 됐고, 그러다 보니까 러시아에 살고 있었던 한국인들이 두 개의 정치 단체를 만든 결과가 나오게 된 거죠. 
러시아 혁명을 저지하려는 제국주의 열강의 군대가 속속 파견돼 들어오는데, 일본, 영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군대가 들어왔습니다. 그 가운데 일본이 가장 많은 군대를 보냈는데요, 1918년 8월 달에 일본군 28,000명이 블라디보스톡에 진주를 합니다. 그리고 이 제국주의 국가의 군대들과 힘을 합치면서 백위파 재정, 러시아를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를 거두고 연해주에서 통치권을 회복을 합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그 지역에 한국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겠죠. 위파 하바롭스크를 점령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 일대에 살고 있었던 한국인들이 전부 피난을 하는 이런 상황이고, 이것이 1918년까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납니다.


자, 1918년 11월 11일 11시 ,  1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됩니다. 이후에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나오고, 이것이 삼일운동에 영향을 주고, 자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데 우리가 빠뜨리고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을 세계 개조의 조짐이라고 받아들였다는 이유가, 3.1운동 때 발표된 독립 선언서에 바로 이 문장이 나옵니다.

기미 독립선언서 이렇게 돼 있습니다. 5천년 역사의 권유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한데 모아서 독립국임을 널리 밝히는 것이다. 영원하고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달을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며, 인류의 양심이 드러남에 따라 일어난 세계 개조의 좋은 기회와 운세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됩니다. 이럴 때 러시아 땅에 살고 있었던 한국인들이 절로 한족회 대회를 열어서 다 모여서 세계 정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고 하는 이런 회의를 합니다. 그래서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를 개편해서 대한국민의회라고 하는 것을 만드는데, 이 대한국민의회는 좀 오래 기억을 해두셔야 합니다.

 대한국민의회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협상을 벌리는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대표를 파견하기도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세계 정세가 바뀌고, 그러면서 우리가 독립을 위한 무언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껏 했던 거죠.

삼일운동이 끝난 다음에 4월 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이 됩니다. 그런데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은 좀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일운동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정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그래서 제각각 임시정부를 수립을 하는데, 이름이 밝혀진 것만도 아홉 개 정도의 임시정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상해 임시정부고, 그리고 또 의미가 있는 것이 대한국민의회입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다음에 상해의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가 통합 논의를 시작합니다.

이때 대한국민의회 쪽에서는 임시정부의 본거지를 러시아 땅 노령으로 이전하자라고 주장을 해요. 그런데 협상의 결과는 이렇게 나옵니다.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의 국민의회를 동시에 해체하고, 국내에서 만들어진 한성 정부라는 임시정부가 또 있는데, 이 한성 정부를 계승하는 형식으로 하되 위치는 상해로 한다 결정이 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되는 건데요. 대한국민의회가 이 조건에 동의를 하고 상해까지 갑니다. 그런데 실제로 구성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러시아에서 건너간 국민의회 사람들이 보기에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라고 볼 만큼 기존의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꾸려져 있었고,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 국민의회 측 사람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참고 참여하자, 아마 이 사람들은 하나의 정부를 구성한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우선이라고 생각을 했겠죠. 노령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하던 이동휘의 한인 사회당이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반면에...

상해 임시정부와 협상을 하고 상해까지 갔던 대한국민의회 쪽 사람들은 안 된다 해서,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노령으로 돌아가서 국민의회 부활 선언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노령을 발판으로 활동을 했던 세력이 둘로 갈라지게 되는 거죠. 이동의 한인 사회당과 국민의회 계열, 둘로 갈라지게 된 겁니다.

대한국민의회 가 옳은 거냐, 한인 사회당이 옳은 거냐, 이건 더 나아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옳은 거냐, 대한국민의회 가 옳은 거냐, 행동을 통일하지 못하고 분열을 겪게 되는데, 이 분열이 뒷날 연해주북간도에서 반일 독립군 부대들의 동족 상잔, 다시 말해 지금 이야기하는 자유시 참변 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이 됩니다.

 

 1920년 4월에 블라디보스톡, 연해주에 진주 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됩니다. 연해주 지역에 만들어진 러시아 혁명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것인데요, 이 전투에서 러시아 혁명 파 군인, 민간인 5천명 이상이 살해당합니다. 이때, 블라디보스톡 외곽에 있던 한인촌을 습격해서, 저명한 한국인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체포해서 총을 쏘았습니다. 이 최재형은 함경북도 경에서 태어나서, 아홉 살 때 부모를 따라서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러시아로 귀화한 사람입니다. 귀화했지만, 그래서 큰 돈을 벌었어요. 이 번 돈을 가지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투신을 합니다. 독립군을 만들기도 했고, 한국 독립운동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고 이랬는데, 1920년 이때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쳐들어왔을 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의병들을 모아서 시가전을 벌렸다고 하는데요, 포로로 죽음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이런 책이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 최재형" 자, 번역이 돼 있습니다. 딸과 아들이 쓴 두 편의 글을 묶어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요, 최재형의 죽음 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아버지 최재형" 최올가 페트로브나, 다섯째 딸이요, 페트로비치, 셋째 아들입니다. 이 대목은 다섯째 딸 최올가 페트로브나가 쓴 것인데요, 이렇게 돼 있습니다. 1920년 4월 5일, 평온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0년 4월 4일, 아버지와 오빠 파벨이 아침 일찍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집을 떠났다. 일본군을 피해 몸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군이 이 마을에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아침에 피신을 한다고 아버지 최재형, 오빠, 큰아들 파벨이 피신을 한겁니다. 그런데 저녁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아침에 떠났다가 저녁에 돌아온 겁니다. 저녁을 먹고 어머니와 우리 모두를 불러 이렇게 말을 해요. "내가 떠나고 없으면 곧 일본인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을 모두 포리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고 충분히 오래 살았으니, 이때 재 나이가 예순 살이다. 죽어도 좋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 말에 우리 모두가 울었습니다. 그렇게 또 한 번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마 아버지도 비슷한 마음이었으리라. 아침 일찍,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무렵, 아버지가 우리 방 덧문을 열었습니다. 그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습니다.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방문이 열리고 총을 든 일본군이 나타났습니다. 거리로 나가 보니 팔이 뒤로 묶인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1920년 4월 5일 아침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끔찍한 광경은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잡지에서 사망자 이름을 보게 되면 우울해서 발을 일으키거나 실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본군이 어떻게 아버지를 고문하고 죽였는지 생각하면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그때 쇠약해진 신경으로 평생 동안 정신적 질병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때 올가의 나이가 16살입니다, 중학교 3학년 나이죠. 이때 이런 참화를 겪게 됩니다.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하게 됩니다. 최재형은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을 한 걸까요? 또 한 가지 생각할 게 있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들어올 때, 여기에 협력한 한국인들이 있습니다. 일본군을 도와서 소련 공산당과 싸운 이 사람들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반공 투사입니까? 친일파입니까? 연해주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더 멀리 아무르주로 피신을 갑니다. 연해주 북쪽의 아무르주, 1920년 2월 이후로 볼세비키 정권이 있던 곳입니다. 더 안전한 곳을 찾아서 이주를 해간 것이죠. 그리고 그곳에서 무장 부대를 창설합니다. 500명 규모의 군대를 만들었고, 이 군대를 가지고 러시아 적군과 함께 내전에 참전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기에서 아무르주 한인 공산당이 조직됩니다. 이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한인 사회당이 변신을 한 겁니다. 자, 한인 사회당이 아무르주 한인 공산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연해주, 아무르주, 이런 지역에서 많은 도시에 한국인들이 모여 살았고, 이 사람들이 공산당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도시의 공산당 조직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한 것이 이르쿠츠크 라고 하는 도시의 한인 공산당입니다. 이르쿠츠크 는 바이칼호 바로 옆에 있는 도시입니다. 지도에서 확인하면 여깁니다. 굉장히 멀어졌죠. 몽골 그 위쪽이 국내에서는 굉장히 먼 지역인데, 여기 살던 한국인들이 공산당 조직을 만든 겁니다. 여기는 1920년 초에 백위파 러시아를 지지하는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내전이 벌어졌고, 이 내전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 지역 한국인들이 한인 공산당을 조직했던 것입니다.이르쿠츠크 의 공산당, 그리고 또 하나는 아무르주에서 만들어진 공산당이 둘은 서로 경쟁하면서 대립하면서 러시아 지역 안에서의 한국인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됩니다. 한인 사회당은 러시아 내에 있는 한국인들을 분리시켜서 한국인만의 대중 조직을 만들자라고 하는 주장을 했고, 이르쿠츠크 의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노동자들과 동등하게 조직해서 러시아의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하자는 입장이었고, 조금 달랐죠. 둘 다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점에서는 일치했지만, 한국인을 독자적으로 분리하지 않느냐 하는 점에서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서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파 고려 공산당의 분열의 초기 모습이 보이는 거죠. 그리고 긴 흐름 속에서는 러시아 땅에서는 한인 사회당이 점차 소수로 전락하면서 이르쿠츠크 파가 점점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방향으로 진행이 됩니다. 자,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분열이 되어 있고 서로 대립을 하는데,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국내 정세입니다. 러시아가 10월 혁명에 성공한 다음에 공산화가 되었지만, 극동 지역에서는 내전이 계속되었고, 또 일본을 비롯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방해도 있었고, 이런 어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러시아가 1920년 4월에 극동 공화국이라고 하는 것을 여기에 만들게 되는데, 이 극동 공화국의 성격이 아주 모호합니다. 극동 공화국은 이런 거예요. 새로 만들어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가 일본 군과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완충지대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 완충 국가. 그래서 이 극동 공화국을 통해서 일본과 협정을 맺고 서로 군사 행동을 중지하기로 하는 이런 약속을 하게 되는데요, 이 극동 공화국 안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지위를 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극동 공화국의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립은 상해에 있는 한인 사회당 쪽과 제휴를 하고, 이르쿠츠크 공산당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르쿠츠크 의 한인 공산당이 독자 행동에 나서면서 갈등이 더 증폭이 됩니다. 여기에 한 갈래가 덧붙는 게 있어요. 아까 이야기했던 대한국민의회 입니다. 이 대한 국민의회가 상해 임시정부 와 통합을 약속하고 상해까지 갔다가,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걸 보고 임시정부를 탈퇴해서 돌아왔고, 국민의회를... 재건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 재건한 대한 국민의회가 이르쿠츠크 공산당과 결합을 합니다. 이 이루쿠츠크 고려 공산당이라고 하는 게 만들어지게 되는 건데요. 이때 중요한 사상의 변화가 있었다고 임경석 선생은 이야기를 합니다. 1920년 9월 달에 민족주의를 버리고 사회주의를 수용한다, 자, 노선의 대립이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민족을 우선할 것이냐, 공산주의를 우선할 것이냐 하는 이런 노선의 대립이 있습니다. 이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됐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를 지지할 것인가, 대한 국민 의회를 지지할 것인가, 상해 파를 지지할 것인가, 이루쿠츠크 파를 지지할 것인가, 노선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러고 있을 때 독립군의 통합 문제가 제기된 겁니다. 먼저 시작은 러시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한국인 빨치산들은 여기저기서 소규모 군대 로 활동하고 있었던 빨치산을 하나로 통합하자 하는 이런 움직임입니다. 통합의 장소는 아무르주에요. 이 아무르주, 1920년 2월 달에 일본군이 후퇴하고 위파 정부도 무너지고 저 위에 의해서 임시 혁명정부가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러 국경에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안전지대다 하는 이런 식이 있었고, 그래서 여기에 러시아 땅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군대들이 결집을 합니다. 자, 이런 부대들이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만 부대, 다반 부대, 독립단 군대, 자, 이런 부대들이 있었고, 아무르 주에는 사할린데라고 하는 빨치산 부대가 있었습니다. 이 부대들이 1920년 11월 쯤 되면, 스바보드나 자유시로 집결을 합니다. 또 스바보드나 하는 것이 본래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920년 10월 경이 되면, 자유시의 러시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 부대들이 속속 결집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 부대들 가운데 한인 자유 보병대대, 이걸 자유 대대 흔히 부르는데, 이 자유 대대는 대한 국민 의회와 결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친 게 아니라, 간도 지방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군이 러시아 땅으로 넘어와서 추가로 합류하는 일이 생깁니다. 바로 이것이 봉호동 청산리 전투 이후에 일본군이 만주로 들어왔고, 이 추격에 쫓겨서 독립군 부대가 북쪽으로 올라가서 러시아로 넘어간다고 했는데, 바로 이 부대들입니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경신 참변이 있는 게 있고, 독립군들이 밀산 이동을 하게 되는데, 밀산 이동할 때 독립군은 이런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공산당과 제휴에서 극동공화국 역내에 대규모 통일된 한인 부대를 만들자라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길에 1921년 4월, 대한 독립단이라고 하는 연합 부대를 만들게 되는데요. 이 연합부대 총재가 서일, 부총재가 홍범도 이렇게 됩니다. 자, 그리고 자유시로 이동을 하죠. 자유시로 이동을 할 때, 러시아 쪽에서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고, 무장 해제 요구를 받아들인 쪽은 자유시로 이동을 했으며,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쪽에서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홍범도 는 넘어갔고, 김좌진은 돌아왔다, 이렇게 되는 건데요. 자유시로 이동했을 때, 한국 독립군 규모가 2천에서 3천명 정도였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원래 그 지역에 모여 있던 러시아 지역의 빨치산 부대와 러시아로 새로 넘어간 홍범도 등의 독립군대를 합쳐서 한 4,500명 정도의 연합부대가 만들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 통합의 과정에서 생기게 돼요. 두 계열의 독립군을 통합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가 않았던 거죠. 먼저, 아무르주에서 만들어진 한인 공산당, 여기는 극동 공화국의 지원을 받았고, 상해의 한인 사회당과 연결이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쪽에서는 부대를 통합해서 대한의용군 이라고 하는 걸 만드는데, 이 대한의용군 을 다른 이름으로 사할린 의용대라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대는 자유시 서북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마자노프라라는 곳으로 옮겨서 주둔을 하게 됩니다. 다른 한 계열은 대한국민의회 가 주도하는데, 이 대한국민의회 는 새로 등장하는 이름이죠. 코민테른 극동 비서와 연결이 되어 있었고, 이쪽이 이르쿠츠크 한인 공산당과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 대한국민의회 는 통합을 하지 않고 자유 대대 중심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다 통합을 하는데 혼자 떨어져 나온 셈이죠. 그러다 보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르쿠츠크 로 이동을 해서 여기에서 코민테른 극동 비서의 주관으로 고려 혁명군이라면 통합을 해야 되는데, 오히려 두 개의 부대가 만들어진 거죠. 한쪽에는 대한의용군 이 있고, 한쪽은 고려 혁명군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코민테른 이라고 하는 건데요. 코민테른 은 1919년에 모스크바에서 창설이 됐고,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고 지원한다는 목표를 갖는 기구입니다. 1921년 1월 달에 러시아 극동 지방에 코민테른 극동 비서가 설치되는데, 설치된 지역이 이르쿠츠크 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이르쿠츠크 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코민테른 과 바로 연결이 됐겠죠. 그러면서 러시아 지역의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의 힘의 추가 이르쿠츠크 로 결정적으로 기울게 됩니다. 분열을 드러내는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1921년 5월 달에 고려공산당이 창당되는데, 두 개가 동시에 만들어집니다. 하나는 1921년 5월 4일부터 15일까지 이르쿠츠크 에서 전한 공산당 창립 대회를 거쳐서 만들어지는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이고, 또 하나는 그거보다 조금 뒤에, 1921년 5월 21일부터 23일까지 상해에서 전한 공산당 대표회가 개최됩니다. 개최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입니다. 기존에 자유시에서 모였던 한국 빨치산 부대독립군 부대도 두 계열로 나뉘어져 있었고, 한국인 공산주의자들도 두 개의 공산당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런 상태에서 이 두 그룹 간의 싸움이 벌어진 거죠. 바로 그것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자유시 변이라고 하는 건데요,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군을 통합하는 문제니까, 당연히 주도권이 상해파가 아니라 이르쿠츠크 파로 넘어오게 되는데요, 이르쿠츠크 파는 고려 혁명군을 중심으로 해서 독립군을 통합을 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고려 혁명군은 소수였고, 대한 의용군은 마자노프라 하는 곳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병력이 약 2천 정도였다고 하고, 자유시에 남아 있었던 고려 혁명군은 600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코민테른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쪽에서 이 소수의 고려 혁명군을 중심으로 통합을 하려고 한 거죠. 당연히 대한 의용군이 반발을 합니다. 그런데 반발에도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대한 의용군이 반발을 어떻게 했느냐? 다시 북간도로 돌아가자, 러시아 땅에서 벗어나자, 실제로 길을 떠나요. 이 떠나는 대한 의용군을 쫓아가서 말리고, 협상을 해서 겨우 제자리로 돌려 놓는데, 이때 대한 의용군 쪽에서 요구한 조건 가운데 고려 혁명군에 있는 대한 국민의회 출신 지도자들을 전부 배제하라, 이런 요구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떻게 협상을 버리면서 수습이 됐는데, 결정적으로 두 군대의 통합 협상이 결렬된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 통합을 하니까 편제를 단일화해야 되겠죠, 연대, 대대, 중대 이렇게 나누는데, 이 편제를 해놓고 나니 결과가 대한 의용군의 부대를 서로 분리하고 축소시키는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는 못 참겠다 해가지고 대한 의용군이 반발을 했는데, 이렇게 되니까 코민테른 또 러시아군 이쪽에서 대한 의용군을 무장 해제시킬 결정을 합니다. 무장 해제시키는 방법은 무력을 쓰는 것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극동공화국 군대 네 개 중대가 주축이 되고, 여기에 고려 혁명군이 더해진 군대가 장갑차, 중화기로 무장을 하고 대한 의용군을 공격을 하는데, 이러면서 자유시 참변 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대한 의용군은 끝까지 싸웠고, 그래서 1921년 6월 28일 하루 종일 새벽 6시부터 시작해서 6시까지 있었다고 하는데요, 죽거나 사로잡히거나 행방불명 되거나 하는 피해를 입습니다. 기록에 따라서 그 피해 상황이 아주 다른데요, 세 가지 서로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이 참변 직후에 북간도에 살고 있던 반일 단체, 한국인 반일 단체에 성문이 있습니다. 이 성문에 의하면 적탄에 맞아 사망한 사람이 72명, 익사한 사람이 37명, 기병에게 쫓겨 산중에서 사망한 사람이 200명, 행방불명된 사람 250명, 포로가 된 사람이... 917명, 이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이것은 피해자 쪽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죠. 가해자 쪽의 기록은 이것과 아주 다릅니다. 가해자 쪽, 고려 혁명군 쪽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사망 37명, 부상 4명, 도망 50명, 포로 900여 명,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아주 다른데, 좀 사실에 가까운 그런 자료는 없을까, 아마 이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독립신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1922년 6월 3일자에 "흑하 사변의 진상"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난 기사가 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전체 1400명 가운데 포로가 900명, 전투 중 사살된 사람이 40명, 그리고 나머지는 행방불명, 이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이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또 이 사람들이 다 살아서 다른 곳으로 갔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진실은 이 어딘가에 있겠죠. 하지만 사망한 사람이 반일 단체 성토에서처럼 수백 명이라고 하는 것은 좀 과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 입니다. 기본적으로 자유시 참변 은 소규모의 독립군 부대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에 주도권 다툼, 이것이 중요하게 작용했고, 그 뿌리에 있는 1900년대 10년대 말부터 상해와 이르쿠츠크 에서 각각 성장해 온 두 개의 공산주의자들의 해묵은 갈등이 밑바탕에 또 깔려 있는 것이죠. 이 자유시 참변 과정에서 홍범도 의 역할이 새롭게 설명된 대목이 있어서 소개를 해 보겠습니다. 임경석 선생의 그 책에 두 개가 더 나오는데요, 이렇게 돼 있습니다. 독립군 군대 지도자 홍범도 와 총군 군대 지도자 최진동, 대한 의용군과 고려 혁명군 간의 무장 충도를 우려했다. 두 사람은 군정 의회와 평화적인 통일 책략 실장, 대한의용군 측에 있으면서 고려 혁명군이 주도하는 통합에 찬성을 한 거예요. 그 이유는 두 군대 간의 무장 충도를 우려했기 때문에라는 것이죠. 그런데 홍범도 와 최진동의 이 제안은 고려 혁명군 쪽에서 다 오히려, 이 두 사람이 몸담고 있었던 대한의용군 쪽에서 거부당합니다. 대한의용군 사령부는 이 조치를 분열책으로 간주했다. 해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협상을 하자고 하는 쪽이 이런 공격을 받을 수 있죠. 오히려 분열책이다. 우리 내부를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해서 거부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금되기까지도 했다는 것인데요. 자, 이 대목에서 홍범도 가 자유시 변의 어떤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볼 수는 없을 것. 또 한 가지는 1921년 6월 달에 군정의 대한 의용군을 통합하려고 했을 때, 이때 일입니다. 그중 대한의용군 내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북간도 독립군 지도자들이 평화로운 문제 해결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북간도 독립군 지도자가 바로 홍범도 를 가리키는 겁니다. 북간도 군대 가운데 두 개 부대가 대한의용군 사령부의 지휘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때 대한의용군 사령부는 이 고려 혁명군과 통합에 반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죠. 자, 그 지위를 거부한 겁니다. 홍범도 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와 안무가 지휘하는 국민회 군대였다. 두 부대는 주둔지 마자 노프를 벗어나 군정 위의 주둔지인 자유시로 넘어갔다. 이때도 홍범도 는 대한의용군 을 분열시킨다 하는 것보다는 전체 독립군을 통합시켜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 앞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 그래서 결과적으로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홍범도 가 결과적으로 고려 혁명군을 지지하게 됐던 것이고, 이것 때문에 대한의용군 쪽에서는 홍범도 를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게 됐고, 그것 때문에 홍범도 가 뒤에 테러를 당하고 그 사람하고 투옥되고 하는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이죠. 여기까지가 1921년 6월 28일에 있었던 자유시 참변 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자유시 참변 은 뿌리 깊은 러시아 지역 한국 공산주의 자들의 경쟁과 반목과 갈등이 빚어낸 사건이었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홍범도 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하는 근거를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1921년 6월 28일 하루 후에 있었던 자유시 참변 은 그날 그 현장만 봐서는 이것이 어떤 일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훨씬 더 넓은, 훨씬 더 큰 그림 속에서, 그리고 더 긴 시간 속에서 이날 여기서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이익주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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