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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예수교국으로 만들려한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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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20세 이승만은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들어가 영어와 서구문명, 기독교를 접했으나 당시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배재학당 입학 시 어머니와 '야소교'는 믿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24세 이승만은 박영효 추종자들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되어 “1899년 1월 경무청 구치소에 구금되었고 그해 7월에 개정된 평리원(고등법원)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한성감옥서에 장기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탄원으로 고종 황제의 감형 특사를 세 차례 받아 5년 7개월간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1904년 8월 7일 석방되었다”(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일조각, 2013, p. 90). 체포 직후 이승만은 경무청 구치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그 뒤로 사형을 예상했기에 정서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어, 이승만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로 회심했다.

이승만은 한성 감옥 수감 중 《신학월보》라는 잡지에 논설들을 실어 일종의 기독교 민족 개조론과 기독교 국가 건설론을 제창했다. 1903년(이승만 28세) 8월에 발표한 「예수교가 대한 장래의 기초」라는 논설에서 이승만은 한국의 전통 종교인 유교를 사람의 도로, 기독교를 하나님의 도로 규정한 다음 “옛적에는 사람의 도로 다스리던 것을 지금은 하나님의 도로 감화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내걸었다(Ibid, p. 91). 이승만은 쇠퇴일로에 접어든 한민족이 소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원천이 예수교에 있다고 보았다.

이승만은 1912년 3월 미국으로 피신했다가 1913년(38세) 2월에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승만은 호놀룰루에 도착한 지 2개월 만에 『한국교회핍박』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이승만은 한국이 개국하고 통상한 지 불과 30년 만에 전국의 교인 총수가 37만 명, 외국 선교사 수가 약 300명, 예배당이 500곳, 교회학교가 926곳, 병원이 13곳으로 늘었다고 기독교의 '흥왕'을 소개하면서 한국은 장차 일본과 청국 등 주변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Ibid, p. 91).

1919년(44세)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은 여러 곳에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국무경, 국무총리, 대통령 등 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된 최초의 임시정부인 노령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이 국무경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이 4월 초 미주 교포 사회에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의 한 미국인 신문기자가 이승만을 찾아와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이번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을 동양 처음의 예수교국으로 건설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Ibid, p. 93). 이승만은 그 뒤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 건국 정책을 계속 드러냈다. 예컨대, 1946년(71세)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히 자유 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노력합시다"라는 내용의 식사를 낭독했고, 1948년 5월 31일에는 임시 국회의장으로서 제1대 국회(제헌국회)를 개원하면서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하나님께 먼저 감사 기도를 드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어서 7월 24일에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고 선서했다."(Ibid, p. 97.)

===>>이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전혀 생각지 않은 처사 아닌가요?


국가의 정체성은 헌법에 명시된다. 대한민국의 기초가 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제헌국회 개원사진-출처: 이승만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제7조

1919년 임시정부, 즉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인 임시정부 헌법 제7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 4월, 20세 이승만은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들어가 영어와 서구문명, 기독교를 접했으나 당시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배재학당 입학 시 어머니와 '야소교'는 믿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24세 이승만은 박영효 추종자들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되어 “1899년 1월 경무청 구치소에 구금되었고 그해 7월에 개정된 평리원(고등법원)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한성감옥서에 장기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탄원으로 고종 황제의 감형 특사를 세 차례 받아 5년 7개월간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1904년 8월 7일 석방되었다”(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일조각, 2013, p. 90). 체포 직후 이승만은 경무청 구치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그 뒤로 사형을 예상했기에 정서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어, 이승만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로 회심했다.

이승만의 기독교 입국론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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