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육영공원 설립에 대해 잘 아시나요?

728x90
반응형

육영공원 설립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가능해졌다.
1883년, 미국 공사가 서울에 부임하면서 양국 간 교육 교류가 시작되었다.
민영익이 이끄는 단체가 미국을 방문한 후 미국식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느꼈다.
헐버트 박사가 미국 다트머스 대학에 방문하여 학습을 진행했다.
서울의 미국 공사관은 조선에 미국식 학교를 설립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육영공원은 조선과 미국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개화 사업으로 추정된다.


헐버트 등 세 명의 선생님이 조선에 초빙되었고, 이는 조선에 근대식 학교 선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이를 미국에서 수입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 이전에 외교 고문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청나라에서 추천된 인물들이었다.
엘렌 더프라는 독일인이 청나라의 추천으로 조선의 세관 고문으로 오게 되어, 오히려 청나라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었다.
또한, 데니라는 미국인이 청나라에서 파견되어 조선에서 첫 태극기를 고정하였고, 대니는 조선의 이익보다 청나라의 이익을 더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육영공원의 교사들은 조선이 외국인을 고용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육영공원은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모델로 하여, 학생들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다.
결국, 교육 방법에 대한 주문이 들어오면서 교육의 방향성과 목표가 더욱 선명해졌다.
미국 공사관은 1883년에 설립되었고,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청나라와 체결되었다.
특히 슈펠트 제독이 1866년 대동강 사건 때 조선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 중요한 사건으로 시기적 배경이 된다.
이 사건에서 조선 사람들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군인이 아닌 상선의 신분으로 조선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또한 1875년 운요호 사건 이후 한국은 일본과 첫 번째 외교 관계를 맺었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기에 대해 상의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미국과 수교를 진행했으며, 사전에 모든 일을 상의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일본의 견제를 목표로 한 미국과의 관계 형성이었고, 헐버트가 청나라를 비난함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이 커졌다.
헐버트 박사가 1911년 말 한국을 떠난 이유 중 하나는 청나라의 방해와 관련이 있었으며, 그는 덕수궁 뒤의 안전지대에 거주했다.
서울에 있던 아들과 함께 살다가 새로운 딸을 낳아, 더 큰 집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당시 '북촌'으로 집을 옮기라는 권유가 있었고, 공급 조정이 이상하게 이루어졌다.
처음 2년 계약 후 3년 계약으로 이어져 5년째에 접어들었으나, 계약 연장에 불안감이 커졌다.
조선 관리가 조정의 음모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이는 청나라의 계략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이 그들의 농간으로 발생했다고 판단된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는 한글이 전혀 없어서 아쉬움을 느낀다.
만약 조약서에 한글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오히려 한자만 들어있었다.
또한 정치가가 빨간 표시로 '캥 덩 업 조센'이라고 적은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이 한국을 국제적으로 소개할 때 '진행될 발음'으로 '조센'이라고 표기한 것처럼, 우리도 한글이 담겼어야 했다.
조선이란 용어는 1910년에 조선 기독교와 관련이 있으며, 연세대학교의 전신도 조선 기독 대학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은 학교 이름을 '조센'으로 호칭했으며, 헐버트 박사는 '조선'을 서양 사람들이 잘못 표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을 통해, 한글이 천대를 받아온 역사와 함께 선조들이 좀 더 빨리 개혁을 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실학파들의 활동이 더 있었다면 조선이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도 느끼고 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