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잘라낸 정치 9단 검객
김영삼은 어떤 인물이었나?
“천하를 말 위에서 얻었는데 내 어찌 <시경>이나 <상서>에 구애되겠는가” 하고 유방(劉邦)이 투덜거리자 고전을 자주 인용하던 육고(陸賈)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어찌 말 위에서 다스리실 수 있겠습니까?(居馬上得之, 守可以馬上治之乎)” 하고 반문했다는 일화가 <사기>에 나온다.
거산(巨山) 김영삼(金泳三)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고사다. 물론 경남고→서울대의 명문교를 나온 그는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몰랐던 건달 출신의 유방과는 학식의 배경이 다르다. 그런데도 묘한 것은 미국의 <뉴스위크>가 보도했던 것처럼 “(김대중은 너무 과격하고, 김종필은 너무 때 묻어 있으며) 김영삼은 능력이 좀 모자란다”(<조선일보>, 1980년 4월 11일)는 식의 세평이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적 능력 부족의 이미지는 그가 경제→‘겡제’, 결식(缺食)아동→‘걸식(乞食)아동’으로 발음한다든지, 정읍에 갔다 와서 “정몽준(전봉준) 고택에 다녀오는 길입니다”라고 한다든지, 초등학교를 방문해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임금)이었습니다”라고 한다든지 하는 실언 때문에 강조된 측면도 있고 “머리는 빌리면 되지만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그 자신의 발언에 의해 더욱 강화된 측면도 있다.
그래서 대선을 앞두고는 늘 국정 운영의 자질과 능력을 의심하는 질문이 쏟아지곤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기자 질문에 아직 경험대학에 재학 중이라고 답한 덩샤오핑(鄧小平)의 말처럼 경험이야말로 값진 지식입니다. 자질이 모자랐다면 어찌 최연소 의원, 최연소 원내총무, 최연소 야당 총재를 감당하고 오늘까지 올 수 있었겠어요?” 하고 대답하곤 했다.
놀라운 일은 14대 대통령 취임 직후에 일어났다. “나는 돈을 받지 않겠다”며 자신의 재산을 먼저 공개한 다음 공직자의 재산 등록을 실시토록 했다. 그 결과 재산이 과도하게 많은 3000여 명의 공직자들이 구속, 파면 또는 징계되었다. 이를 보고 “살맛 난다”고 열광한 국민이 많았다. 이렇게 95%까지 치솟은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그는 전격적으로 ‘하나회’를 제거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 이는 분명한 그의 공이었다. 그러나 임기 중 ‘신경제’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구(舊)경제’에서 못벗어났다든지 외교나 대북관계에서 일관성을 잃었다든지 하는 사례들은 그가 자신의 경험대학에서 배우지 못한 과목들이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더구나 임기 말에 초래된 IMF사태로 그는 9%까지 추락한 초라한 성적표로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냉온탕을 오갔던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영삼과 대통령 꿈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님,이걸 따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하고 당선통지서를 아버지에게 보여 드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산술적으로는 1952년부터였다는 얘기가 되는데 실제 그가 대통령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이었다.
1928년(호적상으론 1927년) 경남 거제도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련(朴富連) 사이에서 1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장목소학교를 거쳐 통영중학에 들어갔는데, 이때의 꿈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통영중학 시절 내가 생각한 장래는 문학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를 졸라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을 몽땅 샀다.”(<김영삼회고록>, 2000) 그러던 그의 꿈이 대통령으로 바뀌게 된 것은 해방 후 일본 아이들의 귀국으로 자리가 많이 생긴 경남중학교로 전학하고 난 뒤부터였다. 정확히는 중학교 5학년 때였다. 이 무렵 그는 하숙방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 쪽지를 써 붙였는데 “친구들도 내 꿈이 너무 황당하다고 보았는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종 이를 떼어 버린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때를 연도로 환산해보면 1947년 초다. 아직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 대통령의 실체도 없을 때였다. 그런데도 ‘대통령’이란 표어를 써 붙였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1974년의 일화를 미리 끌어당겨야 할 것 같다. 그 해 신민당 전당대회 의장에 선출된 변호사 출신의 이충환(李忠煥)은 “지난 69년경 28년생으로 용띠인 거산의 생년월일을 알아가지고 사주를 뽑아보았더니 명태조 주원장(朱元璋)과 같은 사주를 타고났더라”면서 “그러니 이번 전당대회에서 당수가 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귀띔했다고 한다.(강성재, <김영삼과 운명의 대권>,1992)
김영삼의 사주는 진술축미(辰戌丑未)를 갖춘 사고격(四庫格)으로 쉬운 말로는 제왕격이다. 1970년대 중반 그를 한 번 만난 일이 있는 탄허(呑虛) 스님도 “거산은 장차 대권을 잡을 운세를 타고났더라”는 말을 주변에 한 적이 있다고 한다.(강성재)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 일은 없지만 중학 5년의 김영삼은 당시 자신의 운세를 어디에선가 들었기 때문에 ‘대통령’이란 현대적 호칭을 써 붙였던 것이 아아니, 그냥 소년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는 거니까. 그러나 지속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꿈을 계속 키워 나간다는 것 자체가 운명적이다. 1954년 26세의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 그의 대통령 꿈이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난 것은 1965년이었다. 이 해 그는 한 월간지에 <지도자 개발론>이란 글을 기고했는데 거기에 보면 “우리는 이제 지도자를 만들어야겠다. 지도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라는 서두로 인도의 네루와 같은 존경받는 수상 또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다.(<사상계>, 1965년 12월호) 그리고 1969년 3선 개헌 반대연설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꿈을 좀 더 분명히 표출한다. “미국 로스토우란 교수가 지난 67년 한국에 와서 강연하는 가운데 한국경제는 ‘테이크 오프 스테이지’, 즉 도약단계에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67년에 그 말을 했는데, 71년에는 아주 잘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박정희 씨가 아니라 여기에 서 있는 김영삼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 말 그는 ‘40대 기수론’을 제창했다.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이었다. 42세의 김영삼이 던진 이 폭탄선언에 대해 당 지도부는 입에서 아직 젖비린내가 난다는 뜻의 ‘구상유취(口尙乳臭)론’으로 일소에 부쳤으나 다른 40대 두 사람이 이 대열에 뛰어듦으로써 분위기가 일변했다. 대통령의 꿈을 꾸는 또 다른 40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김영삼의 평생 라이벌이 되는 김대중(金大中)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의 대결은 한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5월 20일 신민당 총재에 선출된 유진오(兪鎭午)는 의원총회의 인준이 요청되는 원내총무에 김대중을 지명했다. 당시 김대중은 2선 의원에 지나지 않았지만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동물적 감각으로 그를 알아본 김영삼은 “김대중 의원이 지명되면 결코 인준이 안 될 것”이란 말을 남기고 행방을 감췄다. 이미 1965년 민중당 시절 최연소 원내총무를 역임한 바 있는 4선 의원 김영삼은 자신을 제치고 통합야당(신민당)의 원내총무에 지명된 김대중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김영삼의 반발을 전해 들은 유진오는 부총재(柳珍山)와 사무총장(高興門)을 보내 4시간 동안이나 김영삼을 설득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다음 날 의원총회에서 표결에 부친결과 김대중의 인준이 부결되었다. 김영삼의 견제로 원내총무가 되지 못한 김대중은 “총재님과 지지 의원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결국 원내총무 자리는 임시대행(鄭成太)을 거쳐 5개월 뒤 김영삼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한판승이었다.
두 번째 대결은 1970년 9월 대통령 후보 지명전이었다. 투표 결과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로 나타나 일단은 김영삼이 이겼다. 그러나 과반수 확보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소석(이철승)하고 DJ(김대중)한테서 나온 말이 뭔지 알아요? ‘우리가 남이여, 시방?’ 이 말이었다고. 그러면서 소석 지지자들이 전부 DJ한테 몰아줘서 내가 졌는데 나중에 부산에서 유세할 때 ‘우리가 남이가?’ 그랬다고 해서 나한테 지역감정을 조장한다고 언론에 나와서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고…… 따져보면 그걸 자기(DJ)가 먼저 써놓고 말이야, 내 참.”(이호의 김영삼 인터뷰, <월간중앙>, 2009년 10월호) 이철승이 자파의 표를 몰아줌으로써 김대중은 2년 전 김영삼에 대한 패배를 설욕하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
압승을 예상하고 지명수락 연설문까지 작성해놓았던 김영삼은 속으로 실망했지만 “김대중 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협조를 다짐했다. 그는 김대중으로부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오면 이를 흔쾌히 수락할 결심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40대 후보, 그것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공동전선을 형성한다면 그 파괴력이 막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의는 오지 않았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4월 18일 오후 서울 장충단에서 열린 야당의 유세였다. 이날 모든 언론의 관심은 그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수의 군중이 모여든 서울의 장충단에 집중되었다. 바로 그 시각, 나는 당의 지시대로 충남아산의 면소재지에서 비를 맞으면서 쓸쓸한 유세를 했다. 나의 유세에는 한 사람의 기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연설을 끝내고 시골 여관에 들어 잠을 청했지만 밤늦도록 쉽게 잠들지 못했다.”(<김영삼회고록>) 이때의 서운함을 그는 잊지 못했다. 그러나 감정적인 대립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신 후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지자 이를 정치테러라며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대정부질의에 과감히 나선 것이 라이벌 김영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서는 것을 꺼리던 경색시국이었다. 이후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그는 최연소 야당 총재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2년 뒤 당권을 빼앗긴 그가 1979년 이철승과 다시 맞붙게 되었을 때 그를 뒤에서 도운 사람은 감옥에서 석방된 지 얼마 안 되는 라이벌 김대중이었다
김영삼과 10·26
당시 상황은 당권을 쥐고 있던 이철승이 유리했다. 열세인 김영삼은 김대중을 열 번이나 찾아가 도움을 청했는데, 당시의 정황에 대해 김대중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내가 조윤형(趙尹衡)·김재광(金在光)·박영록(朴永祿) 세 당수 후보를 따로따로 우리 집에 오라고 해가지고 얘길 했어요. 지금 유신을 종말시켜야 하는데 이 사람들과 싸우는 데는 김영삼 씨가 제일 낫다, 정말로 유신에 반대해서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이분뿐이다. 그러니까 적극 밀어주자, 이랬더니 세 분이 참 감사하게도 말을 들어줬지요.”(오효진, ‘김대중 대 김영삼’, <월간조선>, 1985년 4월호) 세 후보는 사퇴 후 김영삼을 밀었고, 김대중 자신은 연금이 풀린 틈을 이용하여 대의원들을 찾아가 중도통합론의 이철승 대신 김영삼을 밀어 달라고 호소했다. 김대중으로서는 1970년 대통령 후보 지명전 때 자신을 밀어준 이철승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으나 민주화를 위해 김영삼을 도왔다고 한다.
이때의 김대중 바람을 당시 신문은 ‘질풍노도’라고 표현했다. 그런 바람이 불었음에도 1차 투표에서는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2차 투표에서 이기택(李基澤)계와 연대함으로써 김영삼은 과반수에서 3표 많은 378표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당권을 탈환한 김영삼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유신정권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당국은 그런 김영삼이 눈엣가시였다. 그 무렵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그 중 1명이 당사로 난입한 기동경찰을 피하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당 총재 선출대회에 참가했던 일부 대의원 자격에 문제가 있다면서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총재단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출한 사건이 발생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김영삼 대신 정운갑(鄭雲甲)을 총재 직무대행으로 선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김영삼은 “가처분 결정은 정치권력에 의한 조작극”이라며 “이 땅에 다시는 4·19와 같은 비극적 사태가 없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를 4·19 직전에 비유한 김영삼의 발언은 청와대의 비위를 건드렸다.
김영삼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은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우방으로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한국 정부에 충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촉구했다.(<뉴욕타임스>, 1979년 9월 16일) 격분한 청와대는 곧 김영삼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공화당과 유정회 명의로 국회에 제출케 했다. 그리고 10월 4일 여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이 제명 처리되었다. 그러자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국회의장 앞으로 사퇴서를 제출했고, 여기에 통일당 의원들도 가세했다. 김영삼의 제명 소식은 그의 근거지인 부산의 민심을 흔들었다.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이에 놀란 당국은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마산으로 번져나갔다. 김영삼의 경고처럼 사태가 4·19와 비슷하게 돌아가자 당국은 서둘러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그러나 부마사태는 결국 유신의 최후를 재촉하는 가장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4시반 경, 나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 수화기를 들었다. 미국에 사는 한 교포가 걸어온 전화였다. ‘총재님, 지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박 대통령이 암살되었답니다.’ 다급하게 전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김영삼회고록>) 이렇게 하여 갑자기 유신정권이 끝난 것이었다. 열흘 뒤 김영삼은 “유신헌법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고 기자들에게 선언하고 앞으로 3개월 안에 개헌해서 대선을 치르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김영삼과 서울의 봄
그러나 헌법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최규하(崔圭夏)는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11월 10일이 되어서야 시국수습을 위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현행(유신)헌법에 따라 체육관 선거로 10대 대통령을 뽑고, 거기에서 뽑힌 10대 대통령이 새 헌법을 마련한 뒤에 다시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다단계 정치일정은 지난날 민주화를 위해 즉각 개헌작업에 들어갔던 허정(許政) 과도정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은 11월 22일 삼청동 공관으로 최규하를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으나 그가 꾸물거리고 있는 사이에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와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이 이끄는 신군부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12·12 쿠데타였다.이 소식을 듣고 신군부의 집권 기도를 우려한 개신교의 원로목사 강원용(姜元龍)이 그날 밤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은 김영삼이 다음 날 약속장소인 남산 식당으로 나갔더니 강원용은 우선 3김이 힘을 합쳐 계엄을 풀도록하고 그 다음엔 “당신과 김대중 둘이 손을 잡아라. 둘이손을 잡는데 대통령은 당신이 먼저 해라. 그 대신 당 총재는 김대중에게 줘라. 그리고 4년 후에 가서 경선을 하라”고 권유했다.
“그랬더니 김영삼 씨는 ‘우리는 민주주의 신봉자니까 대통령 후보든 당 총재든 전당대회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해야지, 우리끼리 약속을 하고 말고 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어요. 말이야 그럴듯 하지만 속셈은 뻔했죠. 그때 당에서는 절대 다수가 김영삼 세력이었으니까. 결국 제 말대로 못 하겠다는 얘기 아닙니까.”(강원용 인터뷰, <신동아>, 2003년 3월호)
강원용은 다음 날 김대중을 찾아가서 설득했으나 역시 실패했다면서 “그 무렵 김대중 씨 쪽 사람들은 정말 대통령이 다 된 걸로 알고 있더군요” 하고 회고했다. 집권을 향한 신군부의 존재가 물밑에서 움직이고 학생과 재야의 데모가 격렬히 진행되었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자리가 다가올 듯한 착각 속에서 ‘서울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무렵 ‘대통령병 환자’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는데, 이는 무엇을 하든 ‘애교’로 받아들여지는 김영삼보다 무엇을 하기만 하면 ‘호되게 욕 먹는’ 김대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김영삼은 “민주화 과정이 지연되는 데 대한 분명한 판단은 미뤄둔 채” 대통령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김대중의 입당을 촉구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영삼의 말에 빗대어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심상치 않은 정국을 우려하면서도 신민당 입당은 마다하고 재야 및 학생과 연대해 독자적인 대권에의 꿈을 펴나가고 있었다.(오효진)
양김(兩金)이 신군부의 위험을 알아차리고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한 것은 1980년 5월 16일이었다. 그러나 너무 때가 늦었다. 다음 날 5·17정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날 저녁 김대중은 전격 구속되었다. 김영삼은 18일 아침 당사로 나가 긴급 정무회의를 열고 서울 시내와 신민당사에 진주한 군의 철수와 구속된 김대중의 석방을 결의했다. 계엄당국의 경고가 있었지만 김영삼은 5월 20일 아침 상도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헌병 2개 중대가 집 안팎을 포위했다. 김영삼은 먼저 들어와 있던 기자들을 상대로 회견을 끝내고, 미처 못 들어온 기자들을 위해 회견문을 담장 너머로 뿌렸다. 이날의 기자회견 내용은 국내 언론에 한 줄도 실리지 않았으나 그의 비서가 담장너머로 던진 회견문 내용은 다음 날 “계엄령 확대는 폭거, 김대중 씨의 석방 요구”라는 제하에 <아사히신문> 1면 톱기사로 보도되었다. 이 다급하고 삼엄한 시점에 김대중의 석방문제를 언급하고 촉구한 정치인은 김영삼밖에 없었다. 기자회견 후 김영삼은 무기한 가택연금에 들어갔고, 5월17일 전격적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주했다는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정치의 절멸이었다.
김영삼과 민추협 시대
이상했다. 고난을 당해도 김영삼이 ‘연금’이면 김대중은 ‘사형’이다. 강도가 달라도 엄청 달랐다. 그래서 반대운동을 하더라도 김영삼 옆에 붙으면 험한 꼴은 당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그의 뛰어난 친화력과 더불어 사람들을 그의 주변에 모여들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1년 만에 연금에서 풀려나자 옛 동지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아직 살벌한 분위기라 점심식사 초대에 나온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 해 송년회에는 전직 의원 30여 명을 비롯한 500여 명의 당원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연금 해제 후 몇몇 사람과 등산을 시작했는데 점점 그 인원이 늘어나서 그 해 6월 9일에는 민주산악회를 정식으로 발족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세(勢)만으로는 민주 회복의 동력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김영삼은 광주민주항쟁 3주년이 되는 1983년 5월 18일을 기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이 사실은 곧 AP·UPI·로이터·AFP·교도통신 등을 통해 외국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국내 언론에는 이틀이 지난뒤에야 ‘최근의 정세흐름’이라는 말장난 비슷한 표현으로 겨우 가십 기사란에 실린 정도였다. 단식 8일째 심신이 쇠약해진 김영삼이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되자 외신들은 상황을 다시 보도했다. 이에 민정당 사무총장 권익현(權翊鉉)이 병실로 찾아와 단식을 중단하고 해외로 나가면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주택과 생활비를 넉넉히 대주겠다는 청와대 측의 생각을 전달했다. 그러자 김영삼은 “김대중을 내보내고 이제 나만 내보내면 너희가 영원히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절대 안 나간다!”(<김영삼회고록>)고 일축했다.
단식 15일째, 전직 국회의원을 다수 포함한 58명의 인사가 코리아나호텔에 모여 김영삼의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민주투쟁범국민연합전선을 추진키 위한 13인 소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단식 18일째인 6월 4일에는 미국에 망명 중인 김대중 부부가 70여 명의 재미동포들과 함께 한국대사관, 국무부, 백악관 앞에서 김영삼을 위한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김영삼과 김대중은 다시 하나로 뭉치게 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1년 뒤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 조직을 바탕으로 만든 신민당은 1985년도의 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켜 어용야당이던 신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표면적인 당수는 이민우(李敏雨)였지만 그 실제 오너가 김영삼·김대중이라는 것을 유권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당시 언론이 김영삼을 ‘결단과 용기의 정치인’이라 부르게 된 데는사실상 그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는 민추협과 신민당의 존재도 한몫했다.
사면·복권의 문제는 남아 있었지만 귀국 후 김대중과 김영삼이 사실상 정치무대로 복귀하자 ‘낚시론’으로 태클을 건 사람이 있었다. “당신들의 시대는 끝났으니 정치는 40대에게 맡기고 낚시나 하며 여생을 보내라”는 김동길(金東吉)의 칼럼이었다.(<한국일보>, 1985년 4월 4일) 이것이 세간에서 파문을 일으키자 소설가 출신의 최일남(崔一男)이 “간난의 세월을 겪고 이제 막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간다’는 성명서 하나 남기고 누구 좋으라고 서울을 떠나라는 것은 막역한 친구 사이라도 하지 못할 소리”라고 반박하여 또 다른 화제가 되기도 했다.(<동아일보>, 1985년 4월 6일)
이 무렵 양김은 굳게 단결해 있었다. 한 언론인이 김대중과의 관계를 묻자 김영삼은 “우리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동반자입니다. 민주화가 될 때까지만의 동반자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우리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남중구의 김영삼 인터뷰, <신동아>, 1985년 4월호)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양김이 맞서 싸워야 할 공동의 적이 존재했던 것이다.
김영삼과 13대 대선
과연 양김이 단결해서 이끄는 민주화운동은 힘이 있었다. 국민적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민우 구상’이니 ‘4·13호헌조치’니 하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5공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양김이 주장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노태우(盧泰愚)의 ‘6·29선언’이었다. 직선제 개헌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단결했던 양김의 공동전선은 사면·복권된 김대중이 그 해 7월 17일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교동 측은 1986년 11월의 불출마선언은 대통령 전두환이 자발적으로 직선제를 수락했을 때 유효한 것인데, 4·13호헌조치로 제안을 거부했던 만큼 이미 무효화됐다는 논리를 내놓았다.
그러나 김영삼은 세세한 논리에 구애되지 않고 김대중의 입당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김대중은 그 해 8월8일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게 되었다. 김영삼은 “세간에는 나와 김대중의 분열을 관측하는 전망도 있었지만, 김대중이 마침내 입당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번에야말로 군사정권의 종식이 확실히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제 한 사람은 대통령 후보로서, 다른 한 사람은 국민의 애정을 듬뿍 받는 지도자로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전국을 다니며 군정 종식과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대통령선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여기에서 국민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자신의 유세를 돕는 지도자란 김대중을 가리킨 것이지만 이는 김영삼의 오산이었다. 8월 27일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대통령 후보추대를 공식화하면서 독자 출마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국민적 요구는 후보단일화였다. 여기에서 김영삼은 김대중을 만나 당내 경선을 제안했다. 민추협을 만들 때나 통일민주당을 만들 때나 양김의 지분은 똑같이 50대50이었으므로 공평한 게임이라는 것이 김영삼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쪽은 같은 지분이라도 당권을 장악한 쪽이 유리한 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또한 사실이었다. 그는 측근들과 상의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이틀쯤 지나 김대중의 측근인 이중재(李重載) 부총재가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김대중이 보낸 메시지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출마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탈당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10월 28일, 김대중은 대통령 출마와 함께 신당 창당을 공식선언했다. 그날 아침 나는 상도동에서 기자들을 만나‘김 고문이 당을 떠나는 것이 과연 국민 여망에 부응하는 길인지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참으로 유감천만’이라고 짤막하게 논평했다.”(<김영삼회고록>)
이후 ‘4자필승론’을 앞세운 동교동계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김대중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했으며, 같은 무렵 정계에 복귀한 김종필(金鍾泌)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하여 1노3김의 대선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11월 들어 전 계엄사령관 정승화, 전 특전사령관 정병주(鄭柄宙),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춘(金在春) 등이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면서 김영삼의 지지도가 노태우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와 시사주간 <타임>도 미 국무부 관리의 말을 인용, “김영삼 후보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규모 부정사건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선이 확실시되었다고 김영삼은 회고했다. 그런데 대선 18일 전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운 KAL기가 미얀마의 뱅골만 상공에서 공중폭파되는 사건이 돌연 발생했다. 이것이 북한의 테러였다는 정보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김영삼의 지지도는 내려가고 안정 희구세력이 결집하면서 노태우의 지지도가 다시 올라갔다. 이렇게 하여 12월 16일 실시된 13대 대선 결과는 1위 노태우, 2위 김영삼, 3위 김대중, 4위 김종필로 나타났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득표율을 합치면 55%로 노태우의 득표율 36.6%를 크게 앞질렀다. 이로써 양김은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데 대한 국민적 비판과 심적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김영삼과 3당 합당
김영삼은 숲을 보고 김대중은 나무를 본다는 말이 있다. 대선 후 김영삼은 여당에 맞서기 위해 야권을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열은 대선 패배의 뼈아픈 교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 총재직을 버리는 승부수를 띄웠다. 김대중을 압박하기 위한 백의종군의 카드였다. 그러나 숲을 보는 김영삼과 달리 나무를 보는 김대중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총선에서 여당을 이기기 위해서는 야권통합보다 현재의 중대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협상이 잘 진척되지 않자 김영삼은 통합을 기대하며 김대중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로써 13대 총선은 소선거구제로 치러지게 되었지만 야권은 통합되지 않은 채였다. 4월 26일의 총선 결과, 전국구를 포함하여 여당은 125석인 데 반해 야당은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 기타 10석으로 나타났다. 여소야대(與小野大)였다. 득표율에서는 3.67%p나 앞질렀음에도 의석 수에서 김대중에게 졌다는 것이 분했지만 그래도 164석이나 되는 야 3당이 공조하면 125석의 여당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김영삼은 5공 청산 등 정치 현안에서 김대중보다 더 강성으로 나가곤 했다. “세가 적으면 선명성을 강조하라”는 것이 오랜 야당생활을 통해 그가 얻은 노하우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문제를 둘러싸고 야 3당 공조에 균열이 왔다. 중간평가를 강행하기로 합의했던 김대중과 김종필이 이를 유보하기로 노태우와 합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된 김영삼은 ‘노정권 퇴진운동’을 외쳤지만 ‘1노3김’에서 ‘3노1김’이 된 신정국에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김종필은 성향이 그쪽이니 그렇다 쳐도 김대중에 대해서만큼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그는 책사 황병태(黃秉泰)의 조언에 따라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목사 문익환(文益煥)의 방북을 계기로 색깔 함정에 빠진 김대중을 따돌리고 그는 노태우와 가까워졌다. 이렇게 하여 차기를 내다본 김영삼과 의회 장악을 노린 노태우와 내각제를 꿈꾼 김종필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세 사람은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선언하게 된다.
김대중은 ‘야합’이라고 비난했으나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거대 여당에 들어간 김영삼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노태우는 통합 당시 말로는 ‘누가 더 있습니까? 김영삼 총재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막상 통합하고 나서는 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내심 김복동(金復東)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김영삼은 회고했다.(신동준, <대통령의 승부수>,2009)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朴哲彦)의 도전도 있었고, 민정당 대표였던 박태준(朴泰俊)의 도전도 있었다. 그러나 야당생활 수십 년에 산전수전 다 겪은 김영삼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과장된 것인지는 모르나 당시 필자가 상도동계 인사로부터 들은 얘기에 따르면 내각제 파동이 일어났을 때 “내가 지금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으면 백만 유권자가 모여들 낀데, 한번 해보겠는가?” 하는 김영삼의 대시(dash)에 노태우가 백기를 들었다고 한다. 마침내 김영삼은 1992년 5월 19일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선거를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 그를 못마땅해 하던 노태우가 민자당을 탈당했다. 당황한 김영삼은 박태준을 만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달라고 당부했으나 거절당하고 그도 탈당하고 만다. 이를 신호탄으로 16명의 현역 의원들이 줄지어 탈당했다.연쇄탈당으로 선거체제를 가동하는 데 애로를 겪기도 했지만 8선 의원 출신의 그는 선거에 베테랑이었다. 주적수인 김대중은 좌파로 몰아붙이고 제3후보 정주영(鄭周永)은 돈으로 대통령 자리를 매수하려 든다고 몰아세웠다. 선거 결과 그는 김대중과 약 200만 표 차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중학 5학년 때 세운 대통령의 목표가 45년 만에 마침내 달성된 것이었다.
김영삼과 재산 공개
대선 결과가 확정된 직후 김대중은 “당선을 축하 드립니다. 조금 전 회견에서 국민들에게 정계 은퇴를 약속했습니다. 당선자께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하고 축하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그의 낙선을 위로하면서 ‘곧 한 번 만납시다. 편한 시간에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라고 했고, 김대중 씨는 ‘좋습니다. 곧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나와의 만남을 피하더니 1993년 1월26일 영국으로 떠났다”고 김영삼은 회고했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2001) 아마도 패자는 울면서 떠났을 것이다. 용호상박의 그가 떠난 한국 땅에 이제는 김영삼에 맞설 만한 적수가 아무도 없었다. 그 때문에 30여 년에 걸친 군사통치를 평화적으로 끝내고 문민정부를 수립한 그의 위상은 거산(巨山)이란 그의 아호처럼 거대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도덕성과 효율성의 위기를 ‘한국병’으로 진단하고 변화와 개혁을 통해 그 한국병을 치유함으로써 ‘신한국 창조’ 또는 ‘제2의 건국’을 해나가자고 국민에게 말했다. 그리고 취임 첫날부터 군사정권 시대에 폐쇄했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를 개방함으로써 시민에게 문민시대의 도래를 피부로 느끼게 했다. 또 시차를 두어 10·26사태가 일어났던 궁정동 안가(安家) 10여 채를 철거하고, 지방 청와대로 불리던 여러 곳의 대통령 전용공관을 폐쇄시켰다. 한편 청와대의 식단을 칼국수와 설렁탕으로 간소화하는가 하면 청와대와 각 부처에 경제 살리기를 위한 예산절약운동을 제창했다. 회심의 카드는 윗물맑기운동이었다. 청와대 비서진과 조각을 끝낸 뒤 그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앞으로 임기 5년 동안 기업이든 일반이든 어떠한 사람한테서도 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저는 상도동에 집 한 채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었다가 물러나더라도 옛날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도동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선언하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먼저 공개했다. 윗물맑기운동의 시작이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유명무실했던 공직자 윤리법을 개정하고, 각 부 주요 공직자 9만여 명의 재산등록을 의무화해 고위 공직자의 재산 내역을 공개토록 했다. 이 과정에서 입법부의 상징인 국회의장 박준규(朴浚圭)와 전 국회의장 김재순(金在淳) 등이 재산 과다 또는 재산 은닉 혐의로 민자당을 탈당하거나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영삼의 오랜 정치적 동지로 문민정부의 창업공신이기도 한 김재순은 정계를 떠나면서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뜻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사자성어에 자신의 서운한 심경을 실어 한동안 시중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다수의 국회의원이 두 사람의 뒤를 따랐고, 이어 부정축재 의혹이 짙은 공무원 3000명이 구속, 파면 또는 징계되었다. 이러한 인적 청산은 국민의 마음을 후련하게 했다. 필자도 기억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역시 달라. 진짜 정치인이 정권을 잡으니까 뭐가 달라도 달라” 하고 김영삼을 칭찬했다. 택시를 타도 그랬고 식당에 가도 그랬다. 모두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보람 같은 것을 느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여론조사에도 반영되어 그의 지지도는 당초의 41.4%에서 60%→70.5%→85%→95%로 가파른 상승곡선을 보였다. 의기양양해진 김영삼은 품에서 두번째 개혁 카드를 꺼냈다.
김영삼과 하나회
그것은 군부 내의 강력한 사조직 ‘하나회’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3공 때부터 존속해온 이 모임의 수장은 군의 표면적 위계질서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군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전두환의 쿠데타로 입증해 보였다. 게다가 하나회 회원끼리 돌아가며 그 장을 맡아온 기무(보안)사는 어떤 민간기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보와 힘을 지닌 막강한 권력기구로 자기들끼리 돌아가며 맡아온 육군참모총장직과 더불어 군의 승진과 인사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었다. 따라서 그 내막을 아는 외국 기자들의 단골 질문은 “대통령에 당선되면 군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그때 나는 ‘두고 보자’는 짤막한 대답만 했을 뿐이다. 그들은 아마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군부세력과 적정선에서 타협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르 몽드>를 비롯하여 전 세계 대부분의 외신이나 외국 정부는 ‘김영삼 씨가 문민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앞으로 군과 동거할 수밖에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분석을 내놓았다”고 그는 회고했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3당 합당의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은 그였지만 실제론 노태우 정부까지를 군사정권이라고 간주하던 그는 “쿵 소리만 나도 누가 쿠데타 했구나 하고 생각할 때였다. 쿠데타가 최고의 죄악인데 나는 대통령이 되면 바로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SBS 특별기획, <한국현대사 증언>,2009년 4월 20일) 그는 취임 열흘 만인 3월 8일 하나회 회원이던 육군참모총장 김진영(金振永)과 기무사령관 서완수(徐完秀)를 전격 교체했다. 친군부적인 어떤 학자는 “국방문제에 대해 별로 아는 바도 없는” 김영삼이 일종의 깜짝쇼를 벌인 것이라고 폄하했지만 국회의원이 된 26세부터 줄곧 국회 국방위원이었던 김영삼은 군에 대해 아주 밝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 전에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때(취임 후)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취임과 동시에 참모총장, 1군사령관,2군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을 한꺼번에 보직 해임하고 후임자를 동시에 임명해서 그날로 취임시켰습니다. 딴 수작을 벌이면 안 되니까 서둘러 취임을 시킨 것입니다.하나회하고 관계없는 사람 중에서 대장을 시키고 이랬더니 깜짝 놀란 겁니다. 천하가 놀란 거예요.”(함성득, <김영삼 정부의 성공과 실패>, 2001) 군 인사를 단행한 이후 그는 측근들에게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어때 놀랬제?” “저쪽 사람들(하나회) 깜짝 놀랬을 거야”라고 장난기 어린 말을 했다고 한다.(강준만, <김영삼 이데올로기>, 1995)
그가 체득한 한 가지는 아무리 강력한 군인이라도 군복을 벗기면 그만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스피드였다. 군은 특수조직인 데다 하나회 같은 사조직은 오랜 세월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집단이라 언제든 세력을 재규합해 저항해올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력 규합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김영삼은 취임 후 100일 동안 국방부·합참본부·고위장성·군단장·사단장·해군수뇌부·공군수뇌부를 구성하고 있던 고위 간부 87명 중 무려 50명을 교체했다. ‘군부 대학살’로도 불린 이 숙청작업에 의해 물갈이된 장교는 모두 1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수십 년간 내 조국의 민주주의에 드리워져 있던 암울한 쿠데타의 망령이 사라지게 되었다”면서 김영삼은 “(당시 내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힘이 있었고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나회를 청산 안 했으면 김대중이나 노무현이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SBS) 자신감에 휩싸인 김영삼은 세 번째 카드를 꺼냈다.
김영삼과 금융실명제
금융실명제였다. 이는 대통령 선거공약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이를 도입하자는 논의는 5공 때도 있었고, 6공 때는 거의 실시할 것처럼 요란을 떨었기 때문에 당시 신문에 이에 관한 기사도 많이 났었다. 그런데도 앞의 두 정권이 이 제도를 채택하지 못한 것은 부작용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김영삼은 결단의 정치인이다. 재산 공개로 국민적 지지를 얻은 그는 6월 22일 경제부총리 이경식(李經植)을 청와대로 불러 실명제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실명제를 빨리 시행하지 않으면 공직자 재산 공개 등 기왕의 정치 개혁작업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식은 실명제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김영삼은 비밀리에 초안을 마련해오라고 지시했다.
이경식은 KDI 연구원 양수길(楊秀吉) 등 극소수의 전문가를 선발한 뒤 보름 만에 초안을 마련해왔다. 김영삼은 7월 12일 재무장관 홍재형(洪在馨)을 불러 그 초안을 넘겨주면서 실무작업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홍재형은 재무부·국세청·법제처·은행 직원 가운데 전문가를 차출하여 실무팀을 만들고, 작업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7월 하순 이들 전원에게 장기 해외 출장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직원과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출국했던 이들은 일본에 도착하자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비밀작업 장소인 과천 아파트에 들어가 작업에 임했다.
7월 28일, 김영삼은 법제처장 황길수(黃吉秀)를 청와대로 불러 금융실명제의 효력이 발생할 수 있는 대통령 긴급명령조항을 하나 만들어 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만반의 준비가 끝난 1993년 8월 12일 그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라고 시작되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역대 어느 정권도 해내지 못했던 금융실명제를 단행하면서 김영삼과 관계자들은 국민들로부터 쏟아져 들어올 칭찬을 기대했다. “기자실 반응이 어때?”라고 김영삼은 출입기자들에게 묻기도 했다.(<월간조선>, 1993년 9월호) 실제 발표가 있던 날 국민과 모든 언론은 개혁다운 개혁을 한다며 환영 일색이었다. 정경유착이나 구 정권 통치권자의 비자금 뿌리를 들여다보게 된 점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뒤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재산소득자의 수입은 드러나지 않고 근로소득자의 수입만 맑은 물밑처럼 드러나게 됨으로써 ‘못 가진 자가 고통 받는 시대’가 도래하고 가진 자의 과소비 풍조가 만연하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또한 사채시장에 의존하던 중소기업들이 금융실명제로 인해 사채시장이 잠수하자 자금난을 겪다가 부도를 내는 사태가 줄을 잇게 되었다.”(김광수, <역사에 남고 싶은 열망>, 2003) 이런 부작용들이 드러나자 언론들은 초기의 환영 논조에서 표변하여 금융실명제가 무슨 나라 망치는 제도라도 되는 것처럼 비판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비판과 걱정이 쏟아지자 김영삼 정권의 핵심은 실망하고 당황하고 어떤 면에서는 분개했다”면서 이후 그 후유증 때문에 1994년 말까지 거의 1년 반 동안 개혁의 침잠기에 빠졌었다고 당시 청와대 정책비서관은 회고했다.
“5년 대통령 임기에 1년 반이란 대단히 긴 시간이다. 다른 정권이면 몰라도 개혁에 정권의 정당성을 걸고 있던 문민정부가 거의 1년 반 동안 개혁전선에 동면을 취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왜 그랬을까?”(전성철)
김영삼과 개혁
부작용으로 인한 비판의 후폭풍에 휩싸이자 개혁 추진세력 자체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예의 청와대 정책비서관은 “대통령은 여전히 개혁 의지를 불태우며 저만큼 나아가 있지만 금융실명제 개혁에서 혼쭐이 난 그의 막료들은 아무도 대통령을 따라가지 않았다"(전성철) 고 회고했고,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3당 합당에 의해 출발한 문민정부 안에 개혁 대상(노태우계·김종필계)과 개혁 주체(김영삼계)가 혼재하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노라고 분석했다.(<박관용 고려대 강의-함성득>)
개혁 추진세력의 규모도 문제였다. 개혁을 누구보다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는 그 추진을 내각에 맡겼다. 물론 청와대가 개혁을 독려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감독차원이었고, 개혁 그 자체는 각 부 장관이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에서는 주로 청와대 수석들이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문제는 장관이 움직일 수 있는 부하는 수백, 수천인데 청와대 수석이 지휘할 수 있는 직속부하는 불과 기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전성철)이러니 효율성 면에서 누가 사령탑을 맡아야 하는가는 명약관화한 것인데 체계적인 조직과 행정 경험이 없는 김영삼은 의욕만 앞선 나머지 자기가 든 개혁의 횃불 뒤로 누가 따라오는지 확인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각을 활성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든 개혁의 횃불 뒤로 따라오는 사람은 청와대 수석과 그 부하 기십 명에 지나지 않는 격이었다. 바로 이 점이 “명령은 5%, 확인과 감독은 95%”라던 박정희의 확인행정과 확연히 차이 나는 대목이다.
대통령의 힘이 장관에게 실리면 부서 전체의 기가 살아난다. 개혁 일을 잘하면 즉각 승진시켜주는 등 보상도 따라줘야 신이 나서 움직이는 법인데, 그런 동기부여는 없고 공무원 3000여 명과 장교 1000여 명만 잘라냈으니 바짝 얼어붙은 공직사회는 당시 등장한 신조어 ‘복지안동(伏地眼動)’처럼 땅에 엎드려 눈알만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장관을 Secretary라고 한다. 대통령제하에서는 장관이 바로 대통령의 비서인 까닭이다. 따라서 각 부처의 일은 야전(野戰)비서인 장관에게 맡기고, 청와대 안의 비서는 자기가 속한 부문에서 어떻게 하면 대통령의 존재를 PR하고 홍보할 수 있는가 하는 일에 전념해야한다. 부서 간 조정업무도 부서 자체의 간섭이 아니라 대통령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 대통령의 인기가 높아야 개혁도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잦은 인사도 문제였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지만 김영삼은 집권 5년 동안 무려 24차례의 개각으로 6명의 총리와 114명의 장관을 양산해냈다.(최진, <대통령 리더십>,2003) 비서진의 교체도 너무 잦았다. 문제는 인물이 바뀌면 정책도 바뀐다는 점이다. 정책의 일관성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김영삼의 개혁이 용두사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의 하나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개혁을 하면 정권이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개혁은 시들해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김영삼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세계화’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되고 WTO체제가 출범함으로써 지구촌 화해가던 당시의 국제환경에서 ‘세계화’의 방향성은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로 나아가자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맥락에서 김영삼은 선진국 경제협력기구인 OECD 가입을 신청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그가 횃불을 든 세계화의 실체는 분명치 않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도 뒤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세계화의 분위기를 이용한 영어학원과 영어산업만 배를 불려나갔다. 여기에서 세계화의 명분을 낚아챈 것은 엉뚱하게도 민자당이었다. 갑자기 정당도 세계화해야 한다면서 민주계의 좌장인 최형우(崔炯佑)가 “당이 세계화하려면 대표직을 없애야 한다”는 공개발언을 한 것이다.
김영삼과 비자금 사건
졸지에 세계화의 화살을 맞은 당대표 김종필은 당혹했던지 “솔직히 세계 무대에서 활동을 해도 내가 더 했는데 날더러 세계화의 걸림돌이라니……”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곧 이것이 후계구도를 둘러싼 권력투쟁의 신호탄임을 알아채고는 “마오쩌둥 전기에 보니 동지를 칠 땐 다른 사람을 시켜 문제를 제기하게 하더라” 하고 최형우뒤의 김영삼을 에둘러 비판했다.(주돈식,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2004) 그는 민주계의 노골적인 밀어내기가 계속되자 민자당을 나와 신당 자민련을 창당했다. 그가 탈당한 뒤 김영삼은 김종필 등의 ‘외인부대’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민주계로 채우기 시작했다. 떡은 달았다. 그러나 쫓겨난 사람들은 모두 김영삼의 정적이 되었다. 김종필계뿐이 아니었다. 집권 후 그는 너무 많은 적을 양산해냈다.
우선 윗물맑기운동과 하나회 숙청으로 밀려난 인사들의 지역 여론이 등을 돌리고 있었고, 개혁 대상으로 삼았던 공무원 집단 내에서도 반(反)김영삼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지도 95%의 환상에 사로잡힌 김영삼 등은 이 같은 민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1996년 6·27 지자체 선거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대참패로 나타났다. 김영삼이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쫓겨난 김종필이 충청지역의 기반을 확보했다는 점보다 대선 후 눈물을 흘리며 영국으로 떠났던 김대중이 귀국한 뒤 ‘아태재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더니 지자체 선거에서 조순(趙淳)을 서울시장에 당선시키는 등 민주당의 약진에 크게 기여한 점이었다.
“사실상의 정계복귀였다. 하지만 김대중 씨는 ‘당원으로서 지방선거에서 후보로 지명된 사람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지원 유세일 뿐 정계복귀는 아니다’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은퇴를 선언했으면 뒤에 물러서 있을 일이고 복귀를 하려면 당당하게 선언할 것이지, 김대중 씨는 은퇴다 아니다, 복귀다 아니다, 당원 자격이다 아니다 등등의 말장난을 계속했다”고 김영삼은 격렬히 비판했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그만큼 김대중의 재등장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중간평가의 성격도 있는 지자체선거에서 참패한 이상, 김대중을 그냥 놔두면 다음해 총선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총선에 지면 자기가 레임덕에 걸린다. 김영삼으로서는 국면 전환의 카드가 절실했다.마침내 그 카드가 제시된 것은 총무처 장관 서석재(徐錫宰)의 입을 통해서였다.
전직 대통령이 4000억원 규모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기자들에게 처음 흘린 것은 그였다. 그러나 파문이 너무 크게 일자 책임을 지고 낙마해야 했다. 두 달 뒤 그 카드가 다시 제시된 것은 대정부 질문에 나선 민주당 의원 박계동(朴啓東)의 입을 통해서였다. 노태우가 관리하고 있는 비자금 4000억원 중 300억원의 비자금이 동화은행 등의 차명계좌 3개에 은닉되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국민적 분노가 일었다.
이에 압박을 견디지 못한 노태우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자신이 재임 중 조성한 ‘통치자금’은 약 5000억원이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서석재나 박계동을 통한 노태우 비자금 폭로가 시작될 때부터 실은 이것이 자신을 겨냥한 카드기도 하다는 것을 김대중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영삼 쪽에서 터뜨리는 것보다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노태우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기 몇 시간 전에 “14대 대선기간 중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아 선거운동자금으로 썼다”고 자신의 중국 방문에 수행 중인 기자들에게 털어놓았다. 이 뉴스는 다음 날 대문짝만 하게 도하 신문에 실렸다. 김영삼으로서는 1석2조였다. 노태우는 구속시키고 김대중은 언론에 맡겼다. 언제나 그렇듯 김대중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보수언론들은 기사로, 칼럼으로, 사설로 연일 그를 때렸다. 뇌물수수의 덫에 걸린 김대중은 보라매공원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5·18특별법과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 것은 김영삼의 ‘깜짝쇼’라고 비판했지만 대세를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영삼과 역사바로세우기
그런데 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심리적 코너에 몰린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전두환이었다. 그의 5공 세력 일부가 활로를 찾기 위해 역시 코너에 몰려 있던 김대중과 정치적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법조출입기자팀이 쓴 전두환·노태우 수사비화’, <신동아>, 1996년 1월호)
이에 김영삼은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명분을 내걸고 12·12쿠데타 및 5·18광주사건을 전면 재조사하도록 검찰에 지시했다. 이에 검찰의 칼끝은 전두환에게로 향했다. 그 해 12월 2일 반란수괴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전두환은 측근들과 함께 연희동 집 앞에서 검찰 소환에 일체 응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검찰은 이례적으로 합천까지 뒤따라가 그를 체포했다. 수사 결과 전두환은 재임 중 기업인들로부터 총 9500억원을 거둬 이 중 7000억원을 비자금으로 사용하고 퇴임시 약 1600억원을 챙겨 개인적으로 관리해왔던것으로 밝혀졌다.
마침내 1996년 2월28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16 명의 전직 장성들이 부패·내란 및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됐다. 더불어 돈을 준 재벌들도 기소됐다. 사정(司正)이나 인적 청산은 언제나 인기가 있다. 국민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인기는 다시 올라갔다. 무엇보다 그를 대항할 만한 적수 김대중의 설 자리를 완전히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 다음 총선을 위해 수확이라면 큰 수확이었다.
김영삼은 선수다. 대항마를 억눌러놓은 ‘정치 9단’은 눈길을 내부로 돌려 총선 출마자들을 하나하나 챙겼다. 그리고 1996년 2월 6일 전당대회에서 노태우의 흔적이 남아 있는 민자당의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꾼 다음 총선 출마자 전원을 국민 앞에 선보였다. 그 결과는 4·11총선의 대승으로 나타났다. 신한국당은 139석(121석)을 확보했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66석)을 얻었다. 그러나 정계복귀 과정에서 민주당과 분열하고 ‘20억+알파’ 수수설에 시달렸던 김대중은 총선 직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은퇴해야 한다”는 응답이 61.1%나 될 정도로 이미지 손상을 크게 입었다. (<동아일보>, 1996년 4월13일) 김영삼은 안도했다. 러나 이 정도로 주저앉을 김대중이 아니었다. 그도 ‘정치 9단’이다. 김영삼에게 쫓겨난 김종필과 힘을 연대하면서 반전의 때를 기다렸다.
4·11총선에서 승리한 뒤 김영삼은 정책수석실을 통해 노동법 개혁안을 준비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완성된 정부안이 국회로 보내진 것은 그 해 12월 10일경이었다. 복수노조 설립을 유예하는 등 대체로 재계 쪽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이 최종안을 노조 측은 반대했다. 야당은 노조 편을 들었다. 여야 합의에 의한 법안 통과가 불가능해 지자 보수언론들은 경제를 위해 여당 단독통과가 불가피하다는 논조를 폈다. 언론의 전폭적 지지를 얻은 신한국당은 자신감을 가지고 12월 16일 이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그러자 날치기 통과라는 절차적 하자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김영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7년 1월 21일 청와대에서 여야 영수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야당의 이해와 협조를 구했으나 김대중과 김종필은 약속이라도 한 듯 ‘원천무효’를 외쳤다. 부메랑이었던 것이다. 원래 김영삼의 친화력은 알려진 것이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뒤로는 “야당과의 정치를 결코 매끄럽게 이끌지 못했다”고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는 회고했다. “여기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YS는 DJ를 대단히 경계했고 불신했고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과연 YS가 진정으로 DJ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을까 의심합니다.”(김창기) 그 역도마찬가지였을까?
김영삼과 9룡
임기 중 김영삼 자신은 이런저런 이유로 재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李健熙)는 중국 방문 중에 “우리나라 기업은 일류인데, 정치는 삼류”라고 한 말이 비위를 건드려 사이가 좋지 못했고, 대선 때 함께 겨룬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鄭周永)은 “양김은 정치 건달”이라고 한 말이 비위를 건드려 정적으로 남았고,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金宇中)은 19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경선 때 이종찬(李鍾贊)을 밀었기 때문에 밉보였고, 선경그룹(SK) 회장 최종현(崔鍾賢)은 정부 개혁에 종종 반대입장을 표명해 사이가 좋지 않았고,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金昇淵)은 사정(司正)에 걸려 해외로 도피했다가 귀국 후 구속시킨 사이였다. 그래도 관계가 괜찮았던 재벌은 LG와 롯데그룹 정도였다.
이처럼 김영삼은 개인적으로 재벌을 선호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경제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군사정권 때보다 더 친재벌적인 문어발식 또는 선단식(船團式) 경영을 허용해주는 꼴이 되었다. 여기서 엄청나게 늘어난 재벌들의 부채 구조가 IMF사태의 한 원인이 된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노태우 정권 때 ‘수서비리’의 장본인이었던 한보그룹이다. 자기 자본이 2200억원밖에 안 되는 회사가 6조원이 넘는 제철소를 빚으로 건설하다 쓰러지면서 삼미·한신·진로 등 거대기업 12군데가 연쇄 도산하게 되었다. 그러자 외국에서 주로 단기외채를 끌어들여 돈을 빌려주던 크고 작은 금융기관들이 압박을 받게 되었고, 이는 다시 기타 재벌들의 자금난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한국 경제는 마치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겠다면서 서둘러 OECD에 가입한 것도 문제였다. 부자나라들의 사교클럽이라고 일컬어지는 OECD에 세계에서 29번째 회원국이 된 것까지는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그 가입을 앞당기기 위해 금융시장을 자유화하고 개방하는 과정에서 대내적으로 필요한 대책을 제대로 강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외국인 직접투자는 국내 기업에 부담이 된다는 논리로 제한하면서 은행의 외환 차입 등 단기성 국제 금융거래를 자유화했는데, 이 결과 급격히 늘어난 단기외채가 총외채의 58%를 점하게 되었다.(김충남)
사정이 이런데도 닥쳐올 외환위기, 곧 IMF사태 같은 것을 경고하는 경제학자나 신문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당시 난립한 종금사(종합금융회사)는 일본의 단기외채를 빌려 동남아 금융시장에까지 투자하는 등 방만한 돈놀이를 하고 있었으나 경제관료들은 그 같은 단기외채의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의 부도 등 경제적 눈사태가 임박해 있었음에도 이를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 언론과 국민과 정치권은 온통 1997년 12월로 예정된 대선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이미 여당인 신한국당에는 대권 예비후보가 9명이나 등장해 가판 주간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당시 언론은 이들을 ‘9룡’이라고 불렀다. 여당후보가 이렇게까지 난립하게 된 것은 야당 후보 김대중이 민주당 분열, 비자금 수수설 등으로 국민적 염증을 야기해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와도 김대중을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가 여당의 9룡을 등장시킨 것이었다.
이 중 김영삼의 민주계는 내적으로 경기도지사 출신의 이인제(李仁濟)를 밀고 있었다. 그러나 한보 비리에 측근과 차남이 연루돼 대국민 사과까지 해야 했던 김영삼의 인기도는 이 무렵 9%까지 추락해 있었다. 이에 반해 ‘3김 청산’의 기치를 내걸어 사실상 김영삼을 간접적으로 때림으로써 김영삼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TK와 민정계의 지지를 확보한 이회창(李會昌)은 개혁성 이미지로 대세를 장악, 그 해 7월 21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야당 후보 김대중보다 20%p나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중앙일보>, 1997년 7월 23일) 누가 보더라도 승리는 떼어놓은 당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가 터졌다.
김영삼과 이회창
그건 김대중의 국민회의 쪽에서 들고 나온 이회창의 두 아들에 대한 병역비리 문제였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서민 유권자들에게 병역만큼 민감한 문제는 없었던 것이다.
판사→부장판사→대법원 판사→대법관→감사원장→국무총리를 거치며 확립해왔던 그의 ‘대쪽’ 이미지가 두 아들의 병역비리 문제로 치명상을 입게 되면서 지지율은 50.3%에서 20%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그러자 경선 2위였던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뛰쳐나가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선 후보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이회창은 10월 7일, 신한국당 사무총장 강삼재(姜三載)를 통해 김대중의 비자금을 폭로케 했다. 이회창 캠프가 대(對)김대중 전략으로 준비해온 카드였다. 주장에 따르면 김대중은 동화은행 등의 365개 차명계좌에 670억원의 비자금을 은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흘 뒤에는 신한국당 대변인 이사철(李思哲)의 2차 폭로가 있었다. 주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92년 대선을 전후해 10개 기업으로부터 134억여 원의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4일 뒤 신한국당 의원 송훈석(宋勳錫)의 3차 폭로가 이어졌다. 주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87년부터 1997년까지 가족 및 친인척 수십 명의 차명계좌 300여 개를 이용하여 378억원을 은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신한국당 의원 정형근(鄭亨根)의 4차 폭로가 있었다. 주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89년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를 유보해주는 대가로 200억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4차에 걸쳐 폭로된 김대중의 비자금을 모두 합치면 1300억원이 넘었다. 이회창은 10월 16일 그동안 폭로한 자료들을 근거로 김대중을 대검찰청에 고발토록 했다. 이렇게 되자 여야 간에는 김대중의 비자금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오갔다. 당시 정국에 대해 김영삼은 “이회창 씨는 온갖 경로를 통해 김대중 씨의 비자금에 대한 검찰수사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나에게 면담을 요청해왔다. 김대중 씨 역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나와의 면담을 요청해왔다. 검찰은 검찰대로 이를 수사해야 될 것인지를 놓고 난감해했다”고 회고했다.
“이회창 씨는 김대중 씨의 비자금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면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불과 2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일단 김대중 씨의 부정축재를 수사하게 되면 그의 구속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전라도 지역은 물론 서울에서도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럴 경우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 없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선거 자체가 없어질 상황인데 어떻게 당선될 수 있단 말인가.”(이상은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에서 인용)
김영삼은 검찰총장 김태정(金泰政)을 불러 수사 유보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김태정은 10월 21일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에 대한 비자금 의혹 고발사건 수사를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로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자 이회창은 바로 다음 날 기자회견을 갖고 김영삼의 탈당을 요구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터뜨리더니 이제는 내가 만든 당에서 날보고 나가 달라는 말이었다” 고 김영삼은 회고했다.
10월 24일부터 김영삼은 대선주자들과 차례차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첫 번째 조찬회동자는 김대중이었다. “김대중 씨는 내가 비자금 수사를 유보한 데 대해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김대중 씨는 이날 나에게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수없이 했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11월 1일에는 이회창과의 조찬회동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비자금 수사를 할 것이 아니면 만날 필요도 없다면서 이회창 쪽에서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더불어 주요 신문들에 전면광고를 내고 김대중에 대한 수사보류 지시를 내린 김영삼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탈당할 것을 요구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정나미가 떨어진 김영삼은 11월 7일 탈당했고, 그 뒤를 따라 서석재 등 김영삼계 의원들이 잇달아 탈당했다. 김영삼과 수평적 정권교체 세상사란 모를 일이다. 한때 재집권이 확실시되던 신한국당이 이인제에 이어 김영삼이 탈당하는 등 자중지란에 빠진 것이다. 이회창은 아들의 구속 등 김영삼의 인기가 바닥권에 있으므로 오히려 그를 때리는 것이 선거에 유리하다는 전략적 판단을 한 것이었으나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선거 후에 밝혀졌다. 적어도 김영삼의 지지기반인 부산·경남지역에서는 이회창 대신 이인제의 표가 30% 이상 나왔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한때 당선이 불가능해 보였던 김대중은 김종필·박태준(朴泰俊)과 ‘DJT연합’을 통해 세를 불려나갔다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한솥밥을 먹다가 적대관계가 된 김영삼의 공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만일 김영삼과 척을 지는 일이 없었다면 이념이 다른 그들 두 사람은 김대중과 연합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IMF사태가 터졌다. 김영삼은 미국에 도와 달라는 전화를 걸었으나 대북 포용정책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던 클린턴은 “국가 부도사태를 면하려면 IMF와의 협상을 12월 1일까지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삼은 일본에 고위관리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지난날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등의 직설 로 심기가 불편해 있던 일본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IMF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OECD 가입을 앞당기기 위해 금융시장을 자유화하면서 그 일환으로 설립된 24개 종금사가 단기외채를 끌어다 썼기 때문이라지만, 유권자들은 모든 일을 맡긴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 부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시 김대중이 내건 선거구호 ‘준비된 대통령’은 유권자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이렇게 하여 한때 세간에서 ‘대통령병 환자’로 야유받기도 했던 대선 4수(修)의 김대중이 그 해 12월 18일 39만 표차로 이회창을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검찰수사를 유보하고, 호남 출신의 국무총리(高建)를 통해 공명선거를 실시했기 때문이라고 김영삼이 주장했는데, 그 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IMF가 왔다는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IMF사태를 신속히 극복해나가는 김대중의 활약상이 보기 싫었던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5년 동안 나는 한국 TV는 보지 않고 일본 NHK TV만 시청했다”고 말했다. 또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탔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는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렇듯 김대중에 대해 끊임없이 라이벌 의식을 느끼던 그도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그를 병문안 갔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던지 “우리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때 기자들이 “화해냐?”고 묻자 그는 “그렇게 봐도 좋다”고 대답했는데 사실 그때 김대중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40년간 지속된 두 사람의 경쟁과 협력관계는 8일 후 김대중이 운명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화해 움직임이 일어 식사 모임을 갖기도 했다. 슬하에 2남3녀를 둔 금년 82세의 그는 아직 정정한 모습으로 이따금 시국에 대해 코멘트하면서 부인과 함께 상도동 집에 살고 있다.
출처: [강준식]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와 미국 일리노이대·FTU 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 동아일보> <뉴욕 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 등에 몸담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양바람 동양바람>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김우중의 대도전> <혈농어수(血濃於水)> 등이 있으며, 평역서로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다-장자> 등이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나라를 흔드는 자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자 이건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홍익인간 이념과 같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