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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내각을 아시나요? 지금은 윤석열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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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고종의 주권회복 시도로 실제적인 내정장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1907년에 들어서면서 근본적으로 대한정책(對韓政策)을 재고(再考)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각부 고문(顧問)들을 통해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지휘감독권을 행사해온 통감부의 통치방식에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대한자강회·서북학회 등 계몽운동단체들, 친일단체 일진회( 일본의 한국 침략에 적극 협력 )

 박제순내각을 경질하여 황제권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친일내각을 결성하기로 결심하고, 1907년 5월 22일 이완용참정대신으로 발탁하였다. 일제가 이완용을 발탁한데는 ‘보호조약’ 체결 당시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과 더불어 일찍부터 황제폐위를 주장해온 것이 크게 고려되었다.

 이완용은 1906년 12월 박제순에게 고종황제를 그대로 두면 정부대신의 빈번한 경질로 결국 친일내각이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내각은 우리의 힘만이 아니고 통감부의 힘으로 유지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므로 황제가 싫어하고 분노해도 내각이 일치협력하여 황제권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로 이완용은 일본측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게 됨.

 이완용은 기존의 정부대신 중 이지용·권중현·성기운의 사표만을 수리하려 했으나,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법부대신 이하영도 사의를 고집함으로써 후임으로 고영희와 조중응을 추천하였다. 나아가 고종과 여론의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진회의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에 발탁하였다. 이완용은 고종에게 종래의 내각이 황제에 의해 임명된 것이라면, 신내각은 처음부터 일본에 의지한 것이라고 주장

 이렇게 성립된 이완용내각친일파로 지목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어느 정도 지위가 있었던 이지용·이하영·권중현·성기운·민영기 등 重臣 大官들 마저 모두 퇴각하고, 이완용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인물들이 대거 포진한 형태였다. 오랜 일본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개화정객 조중웅이 일약 법부대신에 임명된 것도 파격이었다. 무엇보다도 송병준의 입각으로 친일단체 일진회의 지원을 받게됨으로써 이전 박제순내각에 비하면 안정적 출발을 하는 셈이었다. 이토로서는 송병준을 내각에 발탁하여 일진회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보다 강력한 친일내각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제 이완용내각의 성립으로 일제는 자신들의 의도를 아무런 여과없이 통과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적극적 폐위론자인 이완용과 송병준을 앞세워 황제권에 적극 대항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것이었다.

  부득이하게 각료가 황제를 알현할 때는 반드시 국무장관(參政大臣) 이완용을 동반해야 하고, 황제가 설혹 개별적으로 召見하더라도 이를 준열히 거부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고종과 정부대신들의 접촉 자체를 제한하여 황제의 정무간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조치였다.

 더 나아가 6월 14일에는 일제가 그 동안 오랜 숙제로 여겨왔으나 황제권의 반발로 실시하지 못했던 내각관료제<內閣官制>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7월 2일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종황제의 운명도 마지막을 향해 치닫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폐위를 단행하기 위해 고종을 무섭게 몰아붙였다. 7월 3일 이토는 마침 인천항에 입항한 일본 해군중장 일행을 대동하고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일본에 대항하려면 공공연한 방법으로 하라고 힐난하였다. 7월 6일 어전회의에서 송병준은 고종이 스스로 일본 천황에게 가서 사과하든지 아니면 大漢門 앞에서 하세가와 사령관에게 사죄하라고 하면서 2시간 동안이나 핍박하였다. 이토는 본국정부에 보낸 전보에서, 황제의 밀사파견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의를 표현한 조약위반 사실이므로 일본은 한국에 선전포고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향후 일본정부가 취할 방책에 대해 원로대신들이 숙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한국정부의 총리대신 이완용과는 이미 고종의 양위 문제를 거론하였음도 보고하였다.

 일본정부는  첫째 한국 황제로 하여금 大權에 속하는 內治 政務의 실행을 통감에게 위임하게 할 것, 둘째 한국정부로 하여금 내정에 관한 중요 사항은 모두 통감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게 하고, 또 시정개선에 대해 통감의 지도를 받겠다고 약속하게 할 것, 셋째 군부대신·탁지부대신은 일본인으로 임명할 것 등이었다. 

 이처럼 일본정부의 對韓정책이 강경기조로 치닫고 있을 때 일본 재야의 對外硬論者들도 한국병합을 부르짖으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頭山滿 등 黑龍會 인사들이 일본의회에 제출한 對韓政策 의견이나, 大同구락부·猶興會·同志記者구락부·憲政本黨外交調査會·日韓同志會 등이 제출한 의견서들은 대부분 對韓 강경론의 입장에서 적어도 영국의 인도정책, 프랑스의 안남정책과 같은 것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일본정부가 이러한 對韓 강경방침을 전달하기 위해 외무대신 하야시를 직접 파견한 가운데 한국 내각에서는 이완용과 송병준이 앞장서서 황제폐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측이 정권의 위임이나 합병을 요구하기 전에 황제가 알아서 양위로써 사죄하는 것만이 한국이 살길이라는 주장이었다. 7월 16일 열린 내각회의에서는 마침내 황제폐립을 결정하고 이완용이 입궐해 고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고종은 “짐은 죽어도 양위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오히려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했다. 박영효가 나서서 이 위기를 타개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토의 재촉을 받은 송병준이 수백 명의 일진회원들을 동원해 궁궐을 에워싸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면서 사태는 점점 고종에게 불리해져 갔다. 7월 18일 이완용의 집에서 열린 내각회의에서 송병준은 황제가 거부하면 강제로라도 도장을 찍게 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옥새를 확보하라고 지시하고, 그것도 어려우면 우선 황태자 대리를 실행하기 위해 代理의 조칙안과 讓位의 조칙안 두 가지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오후 5시 입궐하여 이토의 고종 알현이 끝난 후 어전에 나아가 양위를 상주했다. 고종은 단연코 거절하면서 궁내부대신 박영효를 불러오라 하였으나 그는 병을 칭하고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고종은 새벽 5시에 이르러 비로소 황태자 대리의 조칙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이날 重明殿에서의 알현에 대신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권총을 품에 숨기고 들어갔다. 황제도 황태자를 비롯한 다수의 宮內官들과 侍臣들을 불러 배석케 하였으나 송병준이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뿐만 아니라 법부대신 조중응이 궁중과 외부 연락이 가능한 전화선들을 모두 절단한 후 양위를 압박했던 것이다.

 그리고 7월 19일자로 마침내 황태자 대리 조칙이 발표되었다. 고종은 어디까지나 황태자 대리를 선언한 것이지 양위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제는 7월 20일 오전 9시 서둘러 양위식을 거행하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純宗(李坧)의 즉위였다. 中和殿에서 거행된 양위식은 신구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고 내관이 이를 대신하는 權停例로 치러졌다 일제는 서둘러 세계 각국에 이를 알리고 고종의 퇴위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의 통곡이 이어지고, 수천명이 모여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폭동사태가 연출되었다. 이완용의 집이 불태워지고 통감이 저격 목표가 되는 등 폭동이 계속되자 정부대신들은 신변의 위협 때문에 통감 관저에 가까운 송병준의 집을 임시 내각회의 장소로 사용할 정도였다. 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교청년회 회원들이 주도하는 시위군중 2천여 명은 종로에 모여 연설회를 개최한 후 일진회 기관신문인 국민신보사를 습격하고, 또 일부는 경운궁 대한문 앞 십자로에 수백명이 꿇어앉아 황제에게 결코 양위하지 말라고 애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군중들의 시위를 일제는 경찰과 주차군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특히 侍衛隊 제2연대 제3대대가 박영효 등과 연계하여 양위반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명분으로 주차군 보병 제51연대 1개 대대를 7월 19일 밤 돌연 경운궁에 입궐시켜 왕궁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또한 서대문 밖에 있던 포병 제17연대 1개 중대는 야포 6문을 이끌고 입성하여 남산 倭城臺 상에 포열을 갖추고 서울시내를 감시하였다. 서울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군들이 서로 기맥을 통해 저항에 나설 것에 대비한 조처였다. 기관포 2문을 가진 일본군대가 軍部 화약고를 점령하고 용산의 육군 화약고도 접수하여 탄약 보급을 차단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였다.이처럼 막강한 물리력을 동원한 일제의 제압으로 양위반대 시위는 점차 수그러들고 말았다.

 고종은 1880년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심한 이래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기까지 언제나 정국의 중심에 서있었다. 1894년 농민전쟁과 갑오개화파 정권의 성립, 독립협회운동 등 민권운동세력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끊임없는 정변·쿠데타·폐위음모 등 왕조시대 전통적인 왕권의 위상은 상실하였으나 1897년 大韓帝國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光武年間에는 측근 친위세력을 양성하여 강력한 황제권을 구사해왔다. 특히 宮內府를 중심으로 추진한 光武改革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중상주의적 식산흥업정책이었다. 물론 자체 능력의 한계와 국제정세의 악화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03년 이후 러일간의 전쟁위기가 점증하자 고종은 우선 러일 양국 사이에서 ‘戰時中立’을 선언함으로써 주권을 지켜보려 하였고, ‘보호조약’ 이후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끊임없이 주권회복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그것이 자신의 폐위를 앞당긴 결과만을 가져왔다. 이제 일제의 주권침탈에 저항하는 마지막 구심점이던 고종이 강제로 퇴위됨으로써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병합은 목전의 일로 한발 더 다가오고 있었다.

  1. 내부대신: 임선준
  2. 군부대신: 이병무
  3. 학부대신: 이재곤
  4. 탁지부대신: 고영희
  5. 법부대신: 조중응
  6.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이완용은 특히 일진회의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발탁했는데, 이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친일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완용은 '한일제휴'를 현실로 인정하고 '시정개선'에 열심인 사람들로 내각을 구성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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