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0월 7일, 대한제국의 귀족 76명이 탄생했다. 윤택영과 이재완 박영효 등 6명이 후작, 이완용 등 3명이 백작, 송병준 등 22명이 자작, 감가진 등 45명이 남작 작위를 받았다. 한일합방 직후 일제가 일본의 화족제도를 응용해 일본 황실령 제14호로 공포한 ‘조선귀족령 朝鮮貴族令’에 따른 조치였다. 허울로나마 조선의 신분제가 사라진 것은 갑오경장(1894년) 이후 불과 16년이었다.
조선의 귀족은 일본 화족과 동일한 예우를 보장 받아, 법규와 동급의 가범(家範)을 제정할 권리를 지녔고, 국가나 왕실 의례시 작위에 따른 지정 좌석을 부여 받았다. 귀족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화족 학교인 가큐슈인(習學院)에 입학할 자격을 얻고, 결원이 생길 경우 도쿄와 교토 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작위는 결격사유(국적을 상실하거나 내란 도박 마약 등 형을 선고 받은 경우)가 없는 한 유지되고 자녀에게 세습됐다.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은사공채증권’도 교부 받았다. 조선은행에서 작위에 따라 거액의 돈을 장기 저리로 대출받는 권리. 그들은 조선총독부가 불하하는 토지와 임야 등을 무상 대부 조건으로 얻거나 그 돈으로 구입해 축재했다. 27년에는 ‘조선귀족세습재산령’으로 재산 세습권을 보장 받았고, 이듬해에는 ‘조선귀족보호자금령’으로 또 궁핍의 방어막을 쳤다. 76명 가운데 김석진 윤용구 한규설 유길준 등 8명이 작위를 거절ㆍ반납했다. 조선귀족회 초대회장은 박영효였다.
화족이 일제 궁내부의 감독을 받듯, 조선의 귀족들은 조선총독부의 감독 하에 있었다. 그들의 작위는 앞선 친일행위의 보상인 동시에 지속적인 협력을 재촉하는 채찍이었다. 권력자는 권력으로, 지식인은 글과 웅변으로 식민정책을 지지했고, 각종 통치ㆍ수탈기구에 가담해 일제의 지배를 보조했다. 이완용 송병준 고희경이 이후의 공로로 승작했고, 독립운동에 가담한 김가진 윤치호 등은 작위를 잃었다. 아편이나 도박 중독 등으로 작위를 박탈 당한 이들도 있었다. 1924년 유일하게 추가로 작위를 받은 이는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남작)였다.
해방 후인 1947년 귀족제도가 폐지되기까지, 작위를 세습한 81명을 포함해 총 158명의 조선 귀족이 존재했다. 그들 중 137명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고, 후손 일부가 부모나 조부모의 재산을 반환하라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곤 했다.
출처: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