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직은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 비서로 일을 했다.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이승만 박사의 뜻에 따라서 였다. 임병직은 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했다. 서울에서 YMCA에 가입하면서 이상재, 이승만을 만났다. 1913년 10월10일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된 것도 이승만의 추천 때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유타, 시카고, 뉴욕을 거쳐 마운트 허먼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때인 1919년 한국에서 3.1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임병직은 대학 2학년 때에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에 참가했다. 대회가 끝나고 이승만이 “자네에게 애국심이 있다면 나를 따르게”라고 하는 한마디에 그를 따라 워싱턴으로 이주했다. 임병직은 구미위원부 설립으로부터 해방이 되어 귀국할때까지 이승만 박사의 그림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 이 무렵 이승만은 임병직을 육군 대령으로 임명했다. 부대도 없는 구미위원부였지만 비서보다는 대외적으로 대령이라는 호칭이 주요 인사들을 접촉하는데 편리했기 때문이다. 임병직은 군복에 호랑이 머리를 수놓은 군모까지 쓰고 다녔다. 커널 임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1920년 이승만과 임병직이 하와이를 거쳐 상해 임시정부로 갈 때 화란선박에 숨어들어갔다가 중국인 부자라고 위장한 후 태평양을 무사히 건너간 일화가 남아 있다.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온 임병직은 2차대전 중에는 구미위원부가 미 육군전략처와 협조하여 한인 청년들을 OSS에 입대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이 귀국했고, 후임으로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1월2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지 5개월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외무부 장관으로 금의환향을 했다. 그리고 2년뒤인 1951년 9월21일 유엔대사로 발령을 받고 9년을 꼬박 뉴욕에서 대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외교를 국제화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1960년 9월 후임인 이수영 유엔대사에게 인계한 후 귀국, 국민운동재건본부 본부장으로 지냈다.1976년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출처: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