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30) 썸네일형 리스트형 이완용 내각을 아시나요? 지금은 윤석열 내각 계속되는 고종의 주권회복 시도로 실제적인 내정장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1907년에 들어서면서 근본적으로 대한정책(對韓政策)을 재고(再考)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각부 고문(顧問)들을 통해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지휘감독권을 행사해온 통감부의 통치방식에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대한자강회·서북학회 등 계몽운동단체들, 친일단체 일진회( 일본의 한국 침략에 적극 협력 ) 박제순내각을 경질하여 황제권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친일내각을 결성하기로 결심하고, 1907년 5월 22일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발탁하였다. 일제가 이완용을 발탁한데는 ‘보호조약’ 체결 당시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과 더불어 일찍부터 황제폐위를 주장해온 것이 크게 고려되었다. 이완용은 1906년 12월 박제순에게 고종.. 혹시 국민보도연맹 시대로의 퇴행인가? 이때도 검찰이 짱인 시대 설립 목적은 '극좌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설립 조직 구성: 총재: 김효석 내무장관 부총재: 백한성 법무차관, 장경근 내무차관 이사장: 김태선 서울시경찰국장 명예이사장: 치안국장 고문: 신익희 국회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등 24명의 국가요인 주요 활동: 좌익 인사들의 전향 유도 지하 좌익분자 색출 및 자수 권유 반공대회와 문화예술행사 개최를 통한 사상 운동 가입 현황: 1950년 초 기준 30만 명 이상의 회원 보유 남로당원 등 극좌 인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 심지어 10대 중고교생까지 가입 문제점: 가입 강요: 경찰서별로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리하게 가입 강요 인권 침해: 가입자들에 대한 기합, 체벌, 강제 반공교육 등 학살 사건: 한국전쟁 발발 후 보.. 아이싸움이 어른싸움 될 판... 대화의 기술 권모술수와 공갈협박 이런건 연습이 되어야 하나부다... 오늘은 초등학교 아이가 친구랑 놀다가 후배가 현질하며 게임하고 있어서, 도박한다고 했던말이 화근이 되어 후배가 엄마한테 전화하며 일러서 그 아줌마한테 우리 애와 친구가 혼나고 있었다. 휴~~~~ 막 따지고 싶었지만, 윈-윈 자세로 바꾸어 듣기만 하고 돌려보냈다. 친구 아이한테도 놀랬지? 집에 들어가서 쉬어... 지아들만 잘났다고 보는 아줌마네... 위로해 주면서 난 내 아들과 집으로 들어왔다. 와 이런 일도 있구나... 이건 약과겠지... 학교폭력으로 더 하는 사람도 종종 보게 되니깐그 후배(5학년)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후배의 엄마와 누나가 내 아들과 친구를 잡고 있었다. 와~~~내가 한판 하는건데 그 후배 나오라고 해서 한바탕할껄 그랬나?..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정부... 이런 정부도 있었습니다. 전쟁 나자 도망친 이승만 정부, 왜 수십만 민간인을 학살했을까 | 한국일보한국전쟁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이상한 전쟁이다. 공식 조사에 따르면 남한에서 전사자는 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17만여 명인데 민간인 사망자는 10www.hankookilbo.com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좌익 전향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었으나, 실제로는 무고한 민간인들도 강제 가입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후 이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청년들을 징집한 후 제대로 된 보급 없이 방치하여 수만 명이 사망하고 20만 명 이상이 동상 피해를 입었습니다. 부역자 처단: 서울 수복.. 조선귀족을 아세요? 1910년 10월 7일, 대한제국의 귀족 76명이 탄생했다. 윤택영과 이재완 박영효 등 6명이 후작, 이완용 등 3명이 백작, 송병준 등 22명이 자작, 감가진 등 45명이 남작 작위를 받았다. 한일합방 직후 일제가 일본의 화족제도를 응용해 일본 황실령 제14호로 공포한 ‘조선귀족령 朝鮮貴族令’에 따른 조치였다. 허울로나마 조선의 신분제가 사라진 것은 갑오경장(1894년) 이후 불과 16년이었다.조선의 귀족은 일본 화족과 동일한 예우를 보장 받아, 법규와 동급의 가범(家範)을 제정할 권리를 지녔고, 국가나 왕실 의례시 작위에 따른 지정 좌석을 부여 받았다. 귀족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화족 학교인 가큐슈인(習學院)에 입학할 자격을 얻고, 결원이 생길 경우 도쿄와 교토 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역사 속 4월 16일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하며 임진왜란기와 광해군대 임시 궁궐인 행궁으로 사용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폐기되었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궁으로 이용되었습니다.대한제국의 정궁(正宮)으로 사용되었고, 현재 덕수궁이라 불리는 궁궐입니다.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선조가 피난지인 의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에 머물면서 행궁으로 사용하던 곳을 1611년에(광해군 3) 광해군이 처음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습니다.1623년(인조 1)에는 인조반정 뒤에 인조가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였으며, 이후 1748년(영조 24)에는 영조가 인조의 즉위처를 확인하기 위해 경운궁에 임어하기도 했습니다. 고종 이전까지 명례궁(明禮宮)이 자리하기도 했습니다.고종대 황폐한.. 윤석열 그리고 김영삼 하나회 잘라낸 정치 9단 검객김영삼은 어떤 인물이었나?“천하를 말 위에서 얻었는데 내 어찌 이나 에 구애되겠는가” 하고 유방(劉邦)이 투덜거리자 고전을 자주 인용하던 육고(陸賈)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어찌 말 위에서 다스리실 수 있겠습니까?(居馬上得之, 守可以馬上治之乎)” 하고 반문했다는 일화가 에 나온다.거산(巨山) 김영삼(金泳三)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고사다. 물론 경남고→서울대의 명문교를 나온 그는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몰랐던 건달 출신의 유방과는 학식의 배경이 다르다. 그런데도 묘한 것은 미국의 가 보도했던 것처럼 “(김대중은 너무 과격하고, 김종필은 너무 때 묻어 있으며) 김영삼은 능력이 좀 모자란다”(, 1980년 4월 11일)는 식의 세평이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는 점이다. 이러한.. 국가가 국민을 챙기지 않은 정부, 역사는 반복되고 있죠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조직적 학살보도연맹원 등의 연행과 구금, 살해는 한강이남 전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났다. 정부는 전쟁 발발 당일인 6월 25일 ‘요시찰인 단속과 전국 형무소 경비’, ‘요시찰인 전원 구금’ 등의 조치를 내렸고, 그에 따라 실제 여러 지역에서 ‘요시찰인’들이 전쟁 발발 당일부터 연행되었다. 제주 성산포경찰서에서 찾아낸 기록 자료에 의하면, 이미 6월 27일 요시찰 검거 구속자를 상부에 보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28일부터 일부지역에서 소집, 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이 살해되었다. 제6사단 헌병대 상사였던 김만식은 28일보다 하루 앞선 27일에 관련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충남경찰국 사찰과에 근무했던 서아무개도 ‘6월말’에 치안국으로부터 좌익.. 이전 1 ··· 3 4 5 6 7 8 9 ··· 17 다음 목록 더보기